<은파악기> 박상완 대표의 모두가 더불어 음악을 즐기는 삶
"40여 년, 인생의 2/3를 바이올린과 함께했습니다. 바이올린은 나의 삶 그 자체죠. 저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그분 다음에는 바이올린을 가장 사랑합니다."
은파악기의 박상완 대표는 대학 시절 형님의 사업을 도와준 것을 계기로 84년부터 바이올린을 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바이올린은 대중이 접하기 힘들고, 사진 한 장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어요. 불모지였지만 그만큼 젊음을 바치면 최고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토목을 전공했던 그는 현악기 정보를 구하기 쉽지 않아 책을 통해 독학하며 악기 제작을 배웠다. 이후 87년도 뉴욕 맨해튼에서 실제 제작자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악기 제작과 수리에 대한 기술 역량을 더 습득하게 된다.
박상완 대표는 바이올린과의 인연이 척박한 환경에서 열심히 하면 최고가 될 수 있겠다는 비즈니스적인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스스로 바이올린 제작자나 수리사보다는 비즈니스맨이라고 생각한다. 박상완 대표가 바라보는 비즈니스란 무엇일까? 그는 바이올린 비즈니스의 성공이 남들보다 좋은 바이올린을 실용적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퀄리티에 가격이 좋던가, 가격이 같지만 퀄리티가 좋다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업의 혁신이 필요했다. 직접 악기 공장을 만들어야 했고, 제작과 수리에 대한 기술도 배워야 했다. 또 제작된 바이올린 판매에만 그치지 않고 음악 캠프, 페스티벌, 연주회 등 음악을 통해 즐거움과 위로를 전달받을 수 있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좋은 환경에서 학생들이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도록 99년부터 매년 2-3회씩 콘서트 월드 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음악인 커뮤니티의 즐거움을 실천하는 장이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진행하며 현지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고, 고아원, 고엽제 피해자 등 위로하고 봉사하는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선생님과 학생이 음악을 통해 베풀 수 있고, 모두가 더불어 음악을 즐기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음악 페스티벌이나 캠프의 개최를 비즈니스의 이익보다는 좋은 환경과 좋은 음악회를 만들겠다고 접근한 그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많은 분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어느덧 해외 30여 회, 국내 10여 회 정도 개최를 그동안 해왔고, 계속해서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발전하고 있다.
"나를 드러내는 연주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연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연주, 위로하는 연주를 합니다. 소외계층에게 음악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필요한 봉사 활동도 함께 나누고 함께합니다."
이밖에도 장애인 기술 양성을 위한 표준사업장을 하면서 전문 기술자를 발굴하기도 했고, 음악을 배우기 어려운 소외계층의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음악과 더불어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늘 도전하였다.
20대 후반에 사업체 3개를 운영했던 그는 사업을 운영하며 어려운 인생의 위기도 몇 차례 겪기도 했다. 삶을 이어가기 힘들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락에 빠졌지만 92년 5월에 신앙을 갖게 되며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2008년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커다란 위기를 또다시 겪고, 우면산 홍수 사태 때 악기가 침수되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사업 포기까지 생각하게 된다. 이 또한 돌이켜보면 힘든 시기였지만 사업의 성공보다는 신앙을 일 순위로 생각하게 되고, 순수하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바꾸면서 또다시 사업이 회복되고 성장하게 되었다.
박상완 대표와의 인터뷰는 좋은 비즈니스란 무엇인지, 어떻게 음악이 모든 사람과 공감하며 더불어 즐거운 장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한 의도는 선한 결과를 낳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앞으로도 널리 이롭게 많은 이들이 음악으로 행복해지고 치유받는 세상을 나 또한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