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발견하는 문화 오감
'피아노와 함께 한 나의 인생 30년'이라고 하면 거창한 프로 연주가의 프로필 같지만 부끄럽게도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피아노를 처음 접하게 된 순간조차 기억나지 않는 다섯 살 때 피아노를 만난 후로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네요. 피아노 학원을 가기 싫어 핑곗거리를 만들었던 순간들과, 여러 해 동안 피아노 먼지 쌓이도록 안 들여다본 시간들도 많았죠. 하지만 어린 시절 손에 화상을 입어 피아노를 며칠간 만지지 못하게 되자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피아노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요. 피아노와 함께 만들고 느꼈던 7가지 단상을 모아봅니다.
C. 망각을 위한 솜이불
피아노는 악기가 아니라 친구입니다.
피아노는 언제나 묵묵하게 방 한 구석을 지켜주면서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지켜주죠.
연주를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무심코 뚱땅거리는 손가락에 음률로서 반응해주는 피아노는
섬세하게 나의 감정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연습을 했으면 한대로, 안 했으면 안 한 대로
매우 정직하게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내가 피아노를 만나서 나만의 소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 거죠.
언제나 나의 손짓에 반응하고, 함께 노래해 줄 수 있는 피아노가 있다는 것은 든든한 친구가 있는 기분입니다.
피아노는 내가 얼마나 곡을 연습했는지, 나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를 있는 그대로 소리의 세계로 투영합니다. 그러한 정직함 때문일까요. 피아노 앞에서는 항상 겸허해집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솜이불을 덮고 있으면 평안한 기분이 들었던 것처럼, 피아노는 솜이불처럼 광폭한 마음과 힘들었던 순간들을 평화롭게 잊게 해 줍니다.
D. 시냇물부터 바다까지
피아노처럼 넓은 음역을 갖고 있는 악기가 또 있을까요?
해저 이 만리를 표현할 수 있을법한 아주 낮은 저음, 속살거리는 시냇물 소리 같은 높은 고음,
터치의 강약에 따라 얇은 얼음판 위를 스케이팅하는 듯한 스치는 소리,
큰 바윗돌이 풍덩 잠수하는 듯한 깊이 있는 소리까지..
그 표현 방법 또한 변화무쌍하죠.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피아노를 듣는 시간'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피아노의 음향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좀 더 먼 여정과 마법의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고, 깊은 심연과 드높은 비행을 위한 시작점이지요."
E. 오브제를 넘어선 공간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에서는 피아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건 벽장에 넣어둘 수 있는 플루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가 아니거든요. 우리는 피아노와 함께 살고, 피아노도 우리와 함께 살죠. 이건 덩치도 커서 무시해버릴 수가 없어요. 마치 가족의 한 사람처럼 말이에요. 따라서 딱 맞는 것이어야 해요! “
피아노는 존재하는 공간의 일부분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람보다 거대한 검은 빛깔의 그림자. 한번 자리를 잡으면 움직이지 않는 바위와도 같아요. 가끔은 여행 갈 때 편하게 함께 할 수 있는 기타와 플루트와 같은 악기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피아노를 만나게 되면 어찌나 반가운지요. 또한 밴드 합주를 할 경우 기타와 베이스는 악기를 들고 와야 하고, 드러머도 드럼 스틱을 들고 와야 하는데 피아니스트는 아무런 준비물이 없어도 되는 자유로움이 있어요. 피아노는 공간 그 자체입니다. 대체 불가능한 존재의 무게를 갖고 있습니다.
F. 나의 로망, 연주의 원동력
어느 날 라디오 방송에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들었어요. 광고에서 들었던 낯익은 음악이었지만 곡 전체를 다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마치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수많은 음표들이 너울거렸는데, 열정적이면서도 아름답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했죠. 이 곡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아노 학원에 있는 악보를 뒤적거려서 찾아내고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떠듬떠듬 연주를 하니 라디오에서 들었을 때의 그 멋진 음악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과연 같은 곡이 맞아? 내 눈과 귀가 의심스러웠죠. 오른손과 왼손이 한 마디 안에서 따로 연주를 처음 해봤어요. 왼손이 음표 3개 칠 때, 오른손은 음표를 4개 쳐야 했거든요. 어쨌거나 달팽이 걸음보다도 느리게 연습하다가 차차 익숙해지니 몇 마디는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는 정도가 되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곡을 나 스스로 연습해서 연주를 할 수 있는 기쁨을 알게 된 순간이었죠.
지금은 신기하게도, 피아노를 쳐야지 해서 치는 것이 아니라 로망이 되는 곡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나타나서, 그것이 바로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G. 미안해요 체르니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 가는 것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요?
유년기 시절 피아노 학원에 끌려가듯 하농과 체르니를 배웠어요. 손가락 연습곡인 하농은 지금 생각해도 일꾼들의 노동가스러워요. 왼손과 오른손이 저음부에서부터 고음부까지 기차놀이를 하듯 줄줄이 오르락내리락거립니다. 숫자 놀이를 좋아하던 체르니 교본은 어떠한가요. 피아노를 얼마나 잘 치느냐는 체르니 몇 번을 치고 있느냐로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체르니 100번? 음 아직 초보이군. 체르니 30번? 그럭저럭 보통 정도는 하겠네. 체르니 40번? 쇼팽은 쳐보셨나요, 베토벤은요. 체르니 50번? 자, 우리 앞에서 연주를 좀 해주시지요. 하지만 수많은 체르니 곡 중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곡이 없어요. 그것은 체르니가 감성적인 곡보다는 테크닉을 연마하는데 중점을 두고 작곡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피아노를 연주할 때 오른손에 비해 왼손이 둔탁하다고 느끼고, 샵이나 플랫이 여러 개 나오면 긴장합니다. 그 원인제공자가 왼손은 반주 위주로, 다장조부터 연습을 시키는 체르니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금은 들어요.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남의 탓이겠죠?
미안해요 체르니.
A. 연습, 연습, 그리고 연주
피아노 연주는 피아노를 매개체로 하여 나의 소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에요.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 움직임에 섬세하게 반응하죠. 종이 위 검은 음표가 내 호흡 안에 살아 숨 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습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롭고 지루한 반복의 순간을 견뎌야만 하나의 음이 연속된 음악으로 확장해 갈 수 있어요. 멜로디를 이끄는 기술적인 도전을 넘어서면 어떻게 나만의 음악을 만들어 낼지에 대한 문제를 만나게 되죠. 무대 위에서의 멋진 연주는 계속 되풀이되는 수많은 도전에 대한 노력의 산물이에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항상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교차합니다. 그전까지 독백 형식으로 나 혼자 읊조리던 음률이 청중과 대화 형식으로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변화할까. 무대 위에서 주어진 단 한순간에 어떤 음악이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긴장되면서 설레죠. 막상 무대 위에서 마주하게 되는 세계는 사차원의 공간입니다. 청중의 박수소리가 들리던 것도 잠깐, 적막이 흐르는 무겁고 고요한 침묵의 순간 피아노에 앉은 내 주위로 신비한 막이 펼쳐집니다. 그것을 공명판이라고 부르면 적당할까요. 호흡과 함께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생각과 감정들은 모두 사라지고, 음악을 흐르게 하는 통로만이 내 몸에 존재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공간이, 음악이, 내가, 청중이 흐르고 있다가 더 이상 밝아질 수 없는 빛, 혹은 더 이상 어두워질 수 없는 어둠으로의 순간이 다가오면 연주가 끝납니다.
B. 장식품 피아노의 활용 비법
피아노 위에 스탠드를 하나 올려놓으면 책 읽기 좋은 공간이 된다.
피아노 의자는 대부분 수납공간이 있다.
여기에 비밀스러운 물건을 숨긴다.
피아노 위에 각종 수납용품을 놓아 집 인테리어의 품격을 높인다.
집에 어린아이가 놀러 왔을 때, 피아노는 좋은 장난감이다.
하얀 건반과 검은건반의 수를 세면서 셈 놀이를 한다.
피아노 덮개를 목도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표가 보이지 않도록 유의할 것.
피아노 덮개는 먼지를 닦는 걸레 대용으로도 좋다.
친구
바다
공간
로망
...
피아노는 또한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