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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라 Nov 20. 2024

딸이 읽어주는 책

1. 이방인 - 알베르 카뮈

“엄마, 내가 <이방인> 읽어줄까?”

“그래, 좋아. 그런데 작가가 누구더라?”

“알베르 카뮈. 엄마는 고전 좋아한다면서 그것도 몰랐어?”

“응. 엄만 이방인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근데 작가가 제임스 딘 닮았다는 건 알아.”

“제임스 딘은 또 누구래” 

“있었어. 그 이방인 작가처럼 생긴 배우가.”


묘하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가였다. 이방인 책에는 담배를 물고 있는 그의 사진이 있었다. 반항하는 영혼의 상징 같은 배우, 제임스 딘의 분위기를 담고 있는 작가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처음 이방인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한 달 전이었다. 잠 자기 전 딸이 갑자기 책을 읽어준다고 제안을 해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별로 관심이 없었던 책을 추천했다. 제목이 주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나는 많은 고전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이방인은 책장에 늘 꽂혀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책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내용이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딸이 그 책을 읽어준다고 했을 때 조금 망설이기도 했다. 딸은 자신이 읽어보고 좋았던 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일차적인 검증은 거친 셈이니 한번 들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중에 작품 해설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이 신화와 같은 소설이 되었다는 평가를 보고서 그럴 만도 하겠다 생각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로 시작하는 이방인. 딸은 이 첫 문장이 이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장이라면서 대단히 강조를 하고 읽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그 문장에서 받은 느낌이 없었는데 강조를 하니 새겨들어야 했다. 주인공 어머니의 장례식 이야기가 꽤 길게 이어졌다. 주인공의 시점으로 보자면 장례식은 불편했고, 더웠으며 피곤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 실컷 자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슬픔이나 비통함을 느꼈을 텐데 주인공은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의아했다. 감정이 없는 것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복잡한 방식으로 알아채지 못하고, 자기만의 단순한 방식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마치 어린아이 같이 감정처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꽤 지루하게 이어진 장례식 이야기를 들으며 그날 밤 잠이 들었다. 책을 읽어주는 딸에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한다. 잘 된 일이다. 나는 듣는 것이 좋고 딸은 말하는 것이 좋으니 서로에게 잘된 일이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딸과 나는 이렇게 책을 읽어주다가 서로 졸리면 자기로 했다. 다음날 나는 주인공이 계속 지루한 장례식을 이어가고 있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어서 그 지루한 부분이 지나가고 흥미로운 주제가 펼쳐졌으면 했다.


이제 주인공은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토록 바라던 잠을 자게 되었다. 다음날 눈 뜬 주인공은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수영을 하고 싶어서 간 해수욕장에서 전에 알고 있었던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과 수영을 즐기고, 희극 영화를 보고,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바로 다음날이었다. 주인공은 한치의 거리낌도 없고, 죄책감 같은 것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주인공의 이런 모습에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되도록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도덕적인 잣대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 타입이다.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불륜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들이 겪을 상처와 아픔에 공감은 가지만, 그들 중 누군가의 도덕적인 그릇됨을 말하기엔 나는 그들에게 그저 제삼자일 뿐이다. 내가 판단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에게도 나는 같은 입장이었다. 엄마의 장례식 다음날 이렇게 즐겁게 보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판단을 하는 것을 미뤄두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듣다 보니 조금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읽고 자자고 했다.


딸은 주인공의 이런 성격에 내가 별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주인공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부분을 강조해서 읽어주곤 했다. 웃음이 나왔다. 문득 딸은 이 책의 어디가 괜찮다고 느껴졌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그것을 묻는 것도 조금 뒤로 미뤘다. 아직은 초반이라 좀 지루하기도 했고, 이 알지 못할 답답함이 얼른 어떤 사건 전개로 인해 풀어졌으면 했다. 좀 이상한 점은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들이 이해가 가면서도 나는 답답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가 이웃들을 만나는 장면이야기가 오늘밤 이어졌다. 이웃들 중에는 가까이하면 좋을 게 없을만한 험한 남자도 있었고, 신경질적인 노인도 있었는데 그들은 현실에서 많이 있을법한 사람들이었다. 주인공에 비하면 어쩌면 좀 더 현실적인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주인공은 그들과 잘 지내는 모습이었다. 조금 험한 남자와는 친구가 되었다. 어쩐지 그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싫은 느낌이었는데 이 책의 사건의 발단이 바로 그 친구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딸이 이방인을 읽어주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서면서 주인공은 어느새 총을 다섯 번이나 쏜 살인자가 되어 있었고, 막바지 법정에서의 판결 모습들이 이어졌다. 초반에 느꼈던 답답함은 어느새 불길처럼 번져서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아랍인에게 첫 발의 총을 쏘고 조금 지난 후 네 발의 총을 더 쏘았을 때는 나의 분노도 절정으로 치솟았다.


“아니 왜에~!!!” 하고 소리를 질렀다. 딸이 엷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법정에서의 시간들은 초반에 비해 무척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주인공은 살인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판결을 받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나는 그가 부당하게 이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즉각적이고도 단편적인 감정처리 방식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단죄받고 있는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주인공은 살인을 했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당연했고, 법의 절차대로 그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나는 그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책을 다 듣고 난 다음에 답답함을 호소했다. 


“분노 같은 감정이 들끓고 있어.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냥 계속 화가 나”


다 읽어주고 책의 내용이 어땠냐고 딸이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내가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나고 분노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며칠에 걸쳐서 생각을 해봤다. 분명 자신의 즉각적인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 감정표현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고 애도하지 않고 졸려서 잤다는 이유로 그가 단죄받을 이유는 없었다.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을 때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결혼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괜찮았다. 그럴 수도 있을 테니까. 사람을 죽인 부분. 이건 명백한 잘못이다. 그래서 그가 법정에 가서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만약, 주인공이 총을 다섯 발이나 쏜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변호사의 의견대로 했다면. 예비 판결 때 판사에게 반성적인 모습을 보이고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마도 그는 사형은 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것들을 하지 않았다. 그건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거짓말하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나는 아마도 그런 그가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좋아했던 그 모습 때문에, 그동안 살아온 그의 모든 삶이 타인들에게 부정당하면서 그들에게 철저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들에게 속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단죄하는 모습이 사형이라는 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나는 그의 사형이 조금은 부당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내 분노의 감정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서 이 작품의 길고도 긴 작품해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작품해설은 늘 책을 다 읽고, 내 생각이 정리되고 난 후에 읽는 편이다. 미리 읽고 작품을 대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이 해석된 시선으로 그 작품을 대하게 된다. 그런 오류를 피하고 싶어서다. 작가의 미국 판 서문을 읽고 나서야 내가 분노로 휩싸인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나는 작가의 의도대로 정말 제대로 낚인 독자였던 것이다. 얼마나 안도의 숨을 쉬었던지.


딸이 첫 번째로 읽어준 <이방인>은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이런 우리만의 밤의 의식을 계속 이어가 보기로 했다. 벌써 두 번째 책을 선정해 놓고 있다는 딸의 표정은 즐거움의 표정이었다. 나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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