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라 Nov 26. 2024

딸이 읽어주는 책

2.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지난번 딸이 이방인을 읽어준 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딸이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늦게라도 그 충격을 경험하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책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 장면이 나오면 딸은 1인 다역을 맡아서 열연을 펼친다. 각 인물에 맞춰서 세심하게 목소리를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책을 읽을 때 그 톤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모습에 우리는 늘 함께 웃곤 한다. 아마도 이런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기에 딸이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더 흥미로워진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묘미가 있다면, 하나의 책 읽기가 끝나고 나면 후속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방인 때도 그랬고 두 번째로 읽어준 <인간실격>도 그랬다. 딸이 읽어주는 것으로 기억한 내용이 약간 정확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꼭 다시 책을 찾아서 읽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읽고, 그 책의 작품해설이나 작가연보까지 다 읽고 나면 그제야 무언가 제대로 끝마쳤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 작업을 거치고 나면 내가 책을 듣고 느꼈던 점들이, 활자로 된 책을 읽고 다시 알게 되는 부분과 작품해설을 거치면서 점점 더 개연성을 얻게 된다. ‘아 그렇지, 그래서 내가 이런 느낌이 들었었던 거지’ 하면서 다시 한번 책을 음미하게 된다. 이렇게 책을 읽는 방법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읽어주는 애씀도 있지만, 독서를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나를 이끌어 주는 것 같아서 되도록 딸이 더 많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방인을 다 읽고 나서 딸은 두 번째 책으로 <인간실격>을 추천했다. 딸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많이 놀랬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감이 높은 아이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의 세계관과 맞물려 어떤 역시너지 효과 같은 것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두 번째로 읽어줄 책의 리스트에 당당히 그 책이 이미 올라와 있었다. 나는 선입견이 강한 타입인 것 같다. 그동안 일본 작가의 서적을 거의 읽지 않아 왔다. 왜 그런지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인간실격도 그 작가의 이름도 알고는 있었지만 굳이 읽고 싶지는 않았다. 작가의 정신세계를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면 피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도 피해 갈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딸이 왜 이 책을 읽고 공감을 했던 걸까 궁금하여 이렇게 외쳤다.


“좋아. 이번엔 인간실격이다. 렛츠고!”


소설의 구성은 화자의 서문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요조의 수기가 시작되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엔 이런 구조라는 것을 모르고 듣고 있다가 첫 번째 수기로 들어설 때 딸이 설명해 줘서 알게 되었다. 

“여기부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이야”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이 책의 첫 문장을, 딸은 이번에도 강조해서 읽었다. 내가 눈만 끔벅거리고 있으니 또 한숨을 쉬는 것이다. 


“엄마, 설마 이 문장도 처음 들어봐?”

“응. 완전 처음 들어봐.”

“엄마 진짜 이상하다니까.”


하긴 이방인의 첫 문장도 몰랐으니 이제 나의 책 편식을 딸도 눈치챘겠구나 싶었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폭 좁고 깊게 읽는 습관이 들어서 하나의 책이 마음에 들면 두 번, 세 번이고 읽게 된다. 정말 긴 시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책에 몰입하고 싶을 때면 <뱀파이어 아카데미> 시리즈 같은, 이틀이나 사흘쯤 잠을 아껴가며 읽게 되는 판타지 장편 소설을 읽는다. 그러고 나면 속 시끄럽게 하는 일들도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거나 사라지곤 한다. 새로운 책을 접한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도전과도 같은 문제이다. 특히나 인간실격과 같은 책은 그 내용을 리뷰로도 찾아본 적이 없었던 소설이었으니 첫 문장을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책 속 주인공인 요조는 어렸을 적부터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인간의 삶을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는 주인공은 사물을 인식하는 것에서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기차역에서의 육교이야기, 지하철 이야기가 그렇다. 타인의 감정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그에게는 타인은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사람들과 섞여서 살아가야 하니 선택한 최후의 방법이 익살이었다.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웃게 만들면, 사람들은 자신을 그들과 같은 범주안에 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주인공 요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처음 읽어준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떠올랐다.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긴 했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서 이방인 같은 존재로 자신을 느끼는 부분에서 두 소설의 주인공을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이 두 책을 권해준 우리 딸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었다.


요조의 익살은 중학교 때 절정을 이루었다. 요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두려워서 익살을 선택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요조의 익살꾼 모습을 그의 본모습으로 받아들였다. 한 친구만 그의 연기를 알아보았고, 그 친구에게는 자신의 익살꾼 가면을 쓰지 않은 요조 그대로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곤 했다. 요조에게는 어쩌면 단 한 명의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딸은 친구가 많지 않았다. 우리가 2,3년에 한 번씩 이사를 가며 학교를 자주 옮긴 탓도 있었을 테고, 내가 학교 엄마들과 소통을 하며 지내지 않아서 더욱 외로운 학교 생활을 해온 것 같았다. 요즈음 아이들의 교우 관계는 아이들 스스로 맺는 관계보다 친한 엄마들끼리의 무리 속에서 친구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많은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엄마들과의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딸의 친구문제까지는 미처 깊게 생각을 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우리 아이가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를 보면서 공감이 갔을 부분이 조금은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딸도 그들의 무리 속에 스며들기 위해서 가면을 써야 했을지도 몰랐다. 주인공 요조의 학교 시절 이야기가 내게 조금은 먹먹하게 다가왔다.


책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요조의 방탕 생활이 시작되어 갈 때쯤, 나는 저자 <다자이 오사무>에 대해서 궁금한 점들을 찾아보았다. 이 책은 어쩐지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인생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역시 내가 지금껏 굳이 이 작가에 대해 알아보지 않고 이 책도 읽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나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본능적으로 마주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 작가의 이력을 조금씩 접하게 되면서 더 읽지 않으려 했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피하고 싶지 않다. 물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일이기도 했다. 작가는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끝에 마지막 자살 시도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불명예라면 불명예스럽게 “자살중독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자이 오사무의 정신세계는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았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발표한 소설이 <인간실격>이었고, 그 내용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작가의 자서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설 후반에는 요조의 술, 여자, 담배, 자살시도, 약물중독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딸이 읽어주는 내용을 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아마도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어 줬다면 도중에 그만 듣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이야기를 딸의 목소리를 통해서 듣고 있다. 딸에게 이런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었는데, 내가 딸의 입으로 그런 세상의 이야기를 접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 요조의 삶은 27살에서 멈추었지만 자살로 끝나지는 않았다. 다행일까? 책 읽기가 다 끝나고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딸에게 이 책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었다. 주인공 요조의 어렸을 적 감정에 공감이 많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 나도 그랬다. 어릴 적 요조의 사람에 대한 극도의 공포스러움은, 소설적 장치를 거두고 나면 보통의 수줍고 소심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주 학교를 옮기면서 그때마다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어린 우리 딸의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서 어린 요조가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그 후의 일탈된 많은 삶들까지 응원할 수는 없었다. 작가가 그렇게 살아간 이유는 시대적인 이유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된다. 


딸의 생각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요조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했다. 어릴 때와는 달리 어른이 되면 일정한 책임이 따르게 된다. 마냥 회피할 수만은 없는 것이 있다. 내가 자살 유가족으로 살아오면서 자살이라는 모든 것들을 피하고 살았지만, 어느 순간엔 그것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듯이 말이다. 




살면서 수많은 고통과 만나게 된다. 최대한 피하고 싶고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은 그 고통과 정면승부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저 익살이나 내면을 가리는 가면으로,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까? 이제 그것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마음의 두려움을 떨치고, 이제는 딸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