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영어가 잘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 안 되는 게 또 영어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모국어가 아닌 이상 매일 조금씩 갈고닦아야 하지만 결국은 게으름 때문에 하지 않게 되잖아요. 그러니 항상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요.
며칠 전 책방에서 100일 영어 필사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관심을 가져보았습니다. 필사라면 그동안 좋아하는 시를 따라서 써 본 적은 있지만 영어 필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시나 좋은 문장, 혹은 명언들을 필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큰 결심 없이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말이기에 공부한다고 여겨질 일도 없으니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영어 필사라니 어쩐지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따라서 쓰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필사할 영어책을 살펴보았습니다. 매일 한 챕터씩 나뉘어 있고, 짧고 간결한 문장들이 길지 않게 담겨있어서 이 정도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어를 공부할 생각으로 시작하면 한없이 부담스러워질 테니 좋은 습관을 들이자는 생각으로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신청했습니다. 영어 단락 아래에는 한글 설명도 함께 있어서 해석의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구조였고, 원어민 MP3가 제공되어 필사하면서 따라 읽기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월 1일부터 시작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책을 받아온 날부터 기대가 되어서 언제 9월이 되나 하고 기다리던 내 모습에 웃음이 납니다.
필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예전에 잠시 원서로 읽는 영어학원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학생들을 관리하면서 영어를 어떻게 학습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영어 원서로 된 교재를 원어민 음원으로 듣고 따라서 말하는 시간을 정말 많이 반복합니다. 이것이 자칫 지루할 수도 있고 힘겨울 수도 있겠으나 결국 아이들은 책을 보지 않고도 영어로 책을 읽어냅니다. 물론 내용도 이해한 상태로요. 듣고 따라 말하기의 힘이 아이들에게 최상의 효과를 나타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간단하고 지치지 않을 영어 필사 루틴을 만들어서 활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그날 필사할 챕터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보지 않고 원어민의 음원을 한 번 ‘흘려듣기’ 합니다. 다 알아듣지 못해도 들리는 단어 위주로 대략 어떤 내용이겠구나 생각해 봅니다. 추론하기라고도 하는데 처음 듣는 상태에서는 쉽지 않았습니다. 키워드가 무엇일지도 생각해 보는데 잘 파악이 되지 않는 것도 많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갑니다. 그것에 신경 쓰다 보면 필사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100일의 기간이 넘기 힘든 기간이 될 것이기에 최대한 그냥 넘깁니다. 음원을 한 번 들은 후 책을 펴서 원어민의 음원을 한 문장씩 끊어서 따라 읽기 합니다. 잘 될 때까지 반복하면 좋겠지만, 이 루틴은 필사 습관을 들이는 데 목적이 있어서 지금은 한 번으로 만족합니다. 한 문장 따라 읽기가 끝나면 음원 없이 챕터 전체를 읽어봅니다. 발음이 부드럽게 잘 안 되는 게 현실이네요. 그래도 신경 쓰지 않고 아래쪽 한글 지문을 읽으며 뜻을 이해한 후 필사하며 마무리 짓습니다.
나만의 영어 필사하는 방법.
1. 책 덮고 원어민 음원 듣기
2. 책 보며 음원 한 문장씩 따라 읽기(한번)
3. 영어 본문 전체 읽기
4. 한글 설명 읽기
5. 필사하기
이런 루틴으로 해보니 10분-15분 정도 소요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방법은 해보면서 언제든 조금씩 수정할 수도 있고, 귀차니즘이 발동되는 날엔 하나씩 빼먹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를 꼭 주려고 합니다. 그래야 100일을 잘 채울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영어 필사의 목적이 영어를 잘하려는 데 있지 않고 좋은 습관을 체득하기 위함이기에, 최대한 영어라는 무게에 힘을 빼고 가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조금이라도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다시 그 일을 하려고 할 때 그건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등산이 너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산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등반하는 동안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땀은 비 오듯 하고 이러다 못 버티겠다고 수십 번을 외치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정상에서 느끼는 환희나 쾌감이 등반의 고통을 넘어서지 못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민한 뇌에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는 걸 자꾸 알려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하기 싫은 날은 하지 않고 넘어갈 자유. 음원 따라 읽기를 생략할 자유.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지 않을 자유. 이렇게 힘들지 않을 선택지를 부여해 준다면, 매일 하는 영어 필사가 힘들지 않다고 여기고 습관처럼 자리에 앉아 영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그러다가 정말 좋은 기억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기다리던 첫 필사를 하는 날 아침, 일요일인데도 아침 6시쯤 눈이 떠진 것이 억울하여 더 잠을 청하려다 문득 필사 시작하는 날임을 깨닫고 부스스 일어나 식탁 앞에 앉아 첫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오래전 잉크가 떨어진 만년필에 잉크를 새로 채우고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서걱서걱 필사를 하고 있는데, 내 앞에 조용히 딸이 앉으며 문제집을 펼쳐보는 것입니다. 일요일은 본인의 안식일임을 선언하고 공부하지 않는 날로 정한 딸이, 누군가의 공부하라는 무언의 압박조차도 전혀 없었는데 말이죠.
우리는 말없이 한 시간 정도 서로의 할 일을 하였습니다. 온전히 자기의 일을 한 것입니다. 첫 필사의 설렘에 이른 아침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쓴 것처럼, 그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운 마음으로 무거운 수능 문제집을 펼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좋은 습관은 좋은 일을 만들고, 좋은 일은 즐거움을 만들어 또 다른 좋은 습관을 찾아 줄 거라는 기대감에 참 만족스러운 오전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 정말 중요한 100일의 필사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끝이 났었습니다. 딸의 수능 100일 D-Day에 맞춰 카운트다운을 하며 필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적당한 책을 고르지 못해서 두어 번 쓰다가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부담이 컸던 탓에 그만둔 마음이 참 씁쓸하였습니다. 좋은 글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필사하면서 응원해주고 싶었는데 습관이 몸에 들기도 전에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필사하는 목적과 의미가 너무 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 켠을 짓누르고 있을 때 다시 필사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최대한 가벼운 마음으로 필사하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만 필사하는 동안은 온 마음으로 기도하듯 필사하려고 합니다. 좋은 마음은 ‘좋은 일’을 끌어당길 거라는 나의 예감이 들어맞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꾹꾹 담아서요.
100일의 영어 필사를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