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기만의 특별한 공간이 있다. 즐거운 추억이 있는 곳, 쓰라린 아픔을 겪었던 곳, 저절로 힐링이 되는 안식처 같은 곳, 때론 상처투성이 영혼의 피난처가 되어 주는 동굴 같은 그런 곳. 나에게 여기 폴바셋은 그런 공간 중 하나이다. 한때 카페 투어를 하며 커피 맛과 카페 분위기에 열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규모가 큰 브랜드 카페보다는 골목에 아담하게 꾸며진 카페를 더 좋아했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에는 매장 사이즈가 주는 중압감이라든지, 자주 접해서 친숙한 이미지는 있으나 비슷한 분위기에 그리 특별하지 않은 맛으로 통일된 느낌이 내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대화소리가 유독 더 크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무렵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는 직접 로스팅을 하는 카페가 유행이었다. 커피 볶는 냄새에 이끌려 저절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카페 중 골목 안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카페가 있었다. 사장님 혼자서 운영하는 드립 전문 카페였는데, 손님이 없을 땐 종종 바(bar)처럼 생긴 테이블에 앉아 사장님이 서비스로 내려주는 여러 원두의 드립 커피를 홀짝홀짝 맛보다가 카페인에 취해서 몽롱이 집으로 돌아갔던 적이 많았다. 커피에 깊게 취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골목 카페에는 정겨움도 있고, 사장님 뒷모습을 닮아 어딘지 모를 쓸쓸함도 담겨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더 프랜차이즈 카페는 멀어지고 있었다.
김포로 이사를 오고 아는 사람도 없이 쓸쓸함이 느껴질 때면 곧잘 작은 카페를 찾아 위안을 얻곤 했다. 뉴스에서는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테이블이 몇 안 되는 아담한 매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적잖이 신경 쓰이지 않을까 하고 운영자 입장에서의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런 ‘카공족’이 되는 일이 생겼다. 오랫동안 생각만 해오던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고 유료 강좌를 등록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늦깎이 수험생이 되었다. 아무래도 오프라인 학원을 매일같이 나가는 것은 거리상의 문제도 있고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어디서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온라인 강좌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집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리라 다짐했지만, 학창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공부를 늦은 나이에 하려니 없던 잠은 왜 그리도 쏟아져 내리는지, 스마트폰의 유혹은 어찌 그리도 강렬한 것인지, 처음엔 하루 2시간을 채우기도 힘들었다. 집에서만 공부를 해서는 안 되겠기에 가방을 챙겨서 집 근처 스터디카페로 향했다(요즘 아이들은 ‘스카’라고 한다고 고등학생 딸이 슬쩍 알려주기도 했다.) 주의사항을 꼼꼼히 읽고 입장했다. 가방을 내려놓을 때, 책을 꺼내 놓을 때, 앉을 때나 일어설 때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신경이 쓰이는 나는 너무도 예민한 사람이란 것을 다시 한번 사무치게 깨달아야 했다. 조용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도무지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눈치 없는 나의 스마트폰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는 공부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없는 누군가의 엄마이자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친구이자 누군가의 누군가였던 것이다.
결국 카공족이 되어 보기로 했다. 종종 카페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해 봤으니 너무 부끄러워 말고 공부해 보기로 했다. 평소 좋아하던 작은 규모의 카페는 너무 민폐가 될 것 같아 차마 갈 수가 없어서 최대한 넓은 매장의 프랜차이즈 카페를 찾았다. 구래동과 장기동 사이에 마치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주유소쯤에 있을법한 레스토랑과 같은 모습의 ‘폴바셋’이 눈에 들어왔다. 높게 세워진 간판이 이국적으로 보이는 그 카페는 2층으로 된 폴바셋 단독 건물이었다. 1층에 카운터가 있어서 2층에 자리를 잡고 공부하기 딱 좋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 무엇보다 폴바셋 라테를 맛본 순간 눈이 번뜩 뜨였다. 그 맛이 그 맛이라며 쳐다도 보지 않았던 프랜차이즈 커피에서 이렇게 맛있는 라테 맛이라니!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선입견이 또 한 번 깨지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라떼는 대부분 폴바셋 라떼만 마셨다. 마치 폴바셋 예찬론자가 된 것처럼. 물론 예민보스인 나의 폴바셋에서의 공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나는 좀 산만한 곳에서, 산만함을 약간 차단한 채 하는 공부가 딱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그 늦은 나이에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그곳이 나에게 더욱 애착이 가게 된 사연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아이스라떼를 사서 자리를 펴고 앉음과 동시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라떼를 그대로 다 쏟아버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엎어진 아이스 라떼는 노트북을 제외한 여러 가지 필기도구들을 지나서 테이블 아래로 무참히 쏟아져 내렸다. 노트북을 건졌으니 괜찮다 괜찮다 되뇌며, 몹시 미안한 마음으로 직원을 호출하여 같이 테이블이며 바닥을 닦았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탓에 바닥을 다 닦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닦는 동안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닦던 직원의 모습에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아무리 자리가 많은 카페여도 거기서 공부를 하는 나 자신이 조금은 눈치가 보이던 차였는데 이런 일까지 벌이고 나니 내 신세가 더 위축이 되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그대로 다시 집으로 가려고 1층으로 내려왔는데, 좋은 인상으로 자리를 치워줬던 젊은 직원분이 나를 불렀다. 내가 시켰던 똑같은 메뉴로 하나를 더 내려서 웃는 얼굴로 건네주는 것이다. 위로의 말도 건네주었던 것 같은데 그 따뜻함에 감격하여 그 말이 도무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따뜻함만은 남아 있다. 평소에 좋아하던 시 구절과 함께.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신문지밥상 中/정일근 시>
폴바셋이 전국에 몇 개의 매장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곳 폴바셋만큼은 나에게 그 어떤 곳보다도 따뜻하고, 라떼가 끝내주게 맛있는 곳이다. 어쩌면 그때의 따뜻함을 전해준 그 젊은 직원은 매장의 매뉴얼대로 행동했는지도 모른다. 힘들어도 평소 교육받은 대로 충실하게 서비스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것은 위로와 다정함이었다. 존중이었고 따스함이었다. 옹졸한 나의 선입견을 뜨겁게 녹여주었다. 그것에 힘입어 나는 어렵다면 어려운 공인중개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합격의 기쁨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불현듯 그 직원이 떠올랐다. 전할 수 없는 고마움을 폴바셋에 갈 때마다 품고 간다. 그곳엔 기쁨이 있고, 나의 노력이 있고, 직원은 바뀌어도 크게 변하지 않는 맛있는 라떼가 있고, 무엇보다 다정한 인간미가 있다. 그곳은 나에게 그런 의미가 있는 장소로 나만의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며칠 전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딸과 함께 그곳에 갔다. 명절 연휴의 휴일이라 그런지 거의 모든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다른 카페의 상황이었다면 그냥 나왔을 텐데 우리는 남은 자리를 잡고 각자의 커피를 시키고 서로의 할 일을 했다. 분위기는 명절만큼이나 한껏 풍성해져 갔다. 가방을 찾아보니 이어폰도 놓고 온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대화에 노출이 된 상태로 이번 주 과제를 하고 있는 내 귀로 옆자리 가족들의 이야기가 갑자기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커피도 커피지만 라떼맛이 너무 좋아.”
“우유로 승부하는 곳 같아.”
“매일우유를 사용해서 그런지 라떼도 그렇고 아이스크림도 정말 맛있는 것 같아.”
역시 나의 입맛은 다른 사람들의 입맛과도 통하는구나 하며 괜스레 남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자신이 웃기기도 했다. 매일유업 기업에서 운영하는 카페라고 하니 라떼에 들어가는 우유의 맛이 다른 라떼와 달리 비릿한 맛도 없고 싱겁지도 않다. 커피와의 비율도 좋아서 우유의 고소한 맛과 커피의 쓴 맛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감미롭게 혀를 감싸고 넘어간다. 라떼의 온도도 아주 훌륭하다. 우유 스팀을 과하게 하여 우유가 너무 뜨겁게 데워지면 우유 맛이 달라진다고 들었다. 아마 영양소도 조금 더 파괴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폴바셋이 내게 특별한 카페가 된 이유에는 라떼의 이런 훌륭한 맛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대화소리에 나 역시 만족스러워하며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도 한 시간이 넘도록 우리는, 각자의 공부를 하고 풍성한 마음이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