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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떠나는 여행 방정식







“오빠, 우리 항공권 예매 좀 도와줘”

“너희가 해본 적 없어?”

“둘이 가는 건 처음이라서. 매번 같이 가는 사람들이 해줬거든.”     


박미혜, 박미해. 누구나 추측 가능한 자매도, 사촌 관계도 아니다. 동네에서 피붙이처럼 자란 절친이지만, 이름이 심히 운명적이지 않은가. 이 둘이 어학연수의 꿈을 안고 더블린 공항에 도착한 날, 입국 동기로 나와 연을 맺었다. 낯선 공기를 확인하듯 나눠 마시며, 더딘 시간을 함께 견뎠다. 이래저래 더블린에 익숙해졌고, 같은 내무반 전우처럼 지낸 지 6개월 즈음. 그들은 더블린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출국 전 마지막 여행. 그 시작을 나에게 부탁했다.     


“로마 인, 베니스 아웃이지? 예매하게 카드 번호를 부르시오.”

“오빠, 우리 통장에 돈이 없거든, 괜찮다면 오빠 카드로 해줄래? 엄마가 내일 넣어준다고 했거든.”

“그러지 뭐.”

“오빠, 그럴 게 아니라 같이 갈래? 가자!!!”     


예약 확인을 누르기 전, 움직이던 모든 게 멈췄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따가워서 얼른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정작 입은 열리지 않았다.     


“저번에 우리랑 골웨이 가기로 했다가, 오빠가 취소했었지?”

“그땐 다른 일......”

“오빠, 이번에도 거절할 거야? 우리 마지막 여행인데? 입국 동기의 마지막 바람이라고.”     


항공권 예매 인원이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었다. 관찰자였던 내가 돌연 주인공 시점으로 축이 돌아가 여행을 기획하게 되었다. 당황스러웠다. 나에게 이탈리아는 일절 계획에 없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이 같은 이유에서 배제되었다. 와인 벨트. 모두 와인으로 유명한 나라다. 여러 종류의 술 중에 소양과 취향 모두 하위권이 와인이다. 홀로 혼란스러웠다. 주도권을 쥐고 진척이 없으니, 볼멘소리가 나왔다.  

      

“우리 덕분에 로마로 가는 거잖아. 고마워해야지.”

“됐고, 너희 숙소는 정했어?”

“아니, 이제 찾아봐야지.”     


혼자 떠나는 여행은 온전히 내 의견이 100% 수렴되기에, 무리할 법할 수준까지 일정을 쏟아붓는다. 다시 안 올 것처럼 돌아다니는 여행은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내 여행 방식을 방정식으로 말하면, 복잡한 사칙연산이다. 어렵게 풀수록 여행에서 오는 쾌감은 증폭된다. 하지만 함께 떠나는 여행에는 다른 방정식을 제시한다. 누구나 풀 수 있는 단순한 사칙연산으로 말이다.   

   

“호스텔은 화장실이 괜찮고, 안전한 곳으로 골라봐.”

“기준을 모르겠어.”

“호스텔월드 사이트 들어가서 괜찮은 곳을 찾은 다음, 관련 블로그 평을 훑어봐.”    

 

그들의 니즈가 정해지면 난 예매 작업에 착수한다. 숙소의 컨디션에 둔감한 난 모든 선택권을 그들에게 넘겼다. 권리를 넘기면, 그 책임도 동시에 흘러간다. 그렇다고 여행 중에 내가 그 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니다. 최소한 나의 책임은 벗어난 격이니 마음이 편했다. 여행 일정도 이 시스템의 연장이라고 보면 된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에서 갈 곳들 정했어?”

“오빠, 그건 이미 며칠 전부터 다 리스트업 했지.”     


그 여행 일정이란 걸 보니, 2030 여성들이 대부분 거친 코스였다. 그들의 브리핑은 ‘어디 어디를 가야 하고’가 아니라 ‘가줘야 한다’로 종결됐다.      


“피렌체에서 티본스테이크를 먹어줘야 해.”      

이전에는 곱창버거가 ‘먹어줘야 하는 리스트’에 선결과제처럼 들어있다. 일정에 독창성이 전혀 없지만, 평가하는 마음을 비우고 들으니 없던 흥미가 생겼다.   

   

‘그래, 여태 혼자 내 멋대로 하는 여행도 지루했어. 이번에는 정해진 문법에 맞게 떠나는 거야.’  

    

이타적인 자세로 동조하는 족족 일정이 차곡차곡 끼워 맞춰졌다. 단, 그 서두에는 내가 취하는 조건이 있었다.     


“난 너희가 정한 일정을 묵묵히 따라다닐 거야. 너희는 내게 도시마다 2곳씩만 들러주면 돼. 동행하는 조건이라면 난 만사 오케이야.”   

  

모니터 앞에서 일어나 그녀들이 해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먹는 중에도 여러 제안이 서슴없이 오갔다. “오빠, 이거 할까?”, “여기 갈래?”. 배려는 또 다른 배려로 돌아왔다. 내 여행관은 탄성력이 부족해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졌다. 그렇다고 불만이 쌓이진 않았다. 수월하게 물 흘러가듯 회의를 마쳤다. 나중에 깨달았다.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의 후속 여행을 계획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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