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여름. 뭍의 습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습함의 물성을 온전히 받아들여 제주의 여름을 흡수하기로 했다. 걷기 좋은 길을 고민하던 중, 그 답을 명확히 점지해줄 사람을 찾았다. 조아신. 제주의 경험이 풍부한 그가 내게 짚어준 곳은 선흘리에 있는 ‘동백동산 습지’였다. 나름 제주 공부를 했지만, 동백동산 습지는 생경했다. 누구나 가보지 않은 곳을 추천한 그에게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는 제주의 비밀을 몇 개 더 품고 있을 것이다. 함덕에서 택시를 타고 습지로 향했다. 택시로 15분 거리. 택시 기사님은 3가지 입구 중에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데 질문의 답을 알 리가 없었다. 어디든 어떠리오. 기사님의 선구안을 믿었다. 도착한 출구는 '서쪽 입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출발하는 게 옳았다. 좁게 나 있는 길로 시작해서 넓은 길로 통하는, 마치 계곡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기승전결이 자연스러운 동선이었다. 습지로 가는 날이 장날인가,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이미 온몸은 습기로 입혀진 지 오래고, 공기 반-습기 반의 비율로 숨이 들어왔다.
습지에 새겨진 길은 걸음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시에 길을 따라 들어갈수록 어두워지더니 하늘이 닫혔다. 나무가 터널을 자처하고 하늘의 대부분을 가렸다. 잎에 부딪혀 울어대는 빗소리에 비해 내게 닿는 건 극히 일부였다. 의욕이 꺾였는지 내리던 비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탐방로는 습도 100%의 천연 사우나가 된 지 오래다. 내가 나무요, 이 습지 속의 오브제가 되었다. 안경에는 김이 서렸다. 비는 스콜처럼 다시 내렸다. 내린 비는 흙과 닿아 다시 원기가 충천하듯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주위는 어두워지는데, 빗발은 세졌다.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 적당히 찾아온 우울함이 꽤 잘 어울렸다. 습지 한복판에 서서 음악을 틀었다. 자우림의 '미안해 널 미워해'. 오감으로 듣는 자우림 음악은 제주가 깔아준 멜로디 같았다. 새도 화음 한 줄 정도 거들었다. 하늘이 열어준 콘서트는 이렇게 절정에 다다랐다.
공연이 끝나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60분 정도였을까, 하늘이 조금씩 입을 열었다. 다소 미약한 자연광이 내 몸에 잠든 엽록소를 깨웠다. 한숨 크게 쉬고, 습지와의 헤어짐을 준비했다. 앞이 탁 트인 길과는 다른 시간이었다. 느린 속도로 90분 동안 동백나무가 지탱한 길을 걸었다. 보통 걷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는 데 있다. 또한 풀리지 않는 숙제를 해결하던지. 오늘의 도보는 오롯이 습지 내부의 것들로 문답이 오갔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몸으로 관람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