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역사와 서사는 꽤 복잡하다. 해방 후 미군부대 주변으로 형성된 아메리카 타운도 군산만의 문화다. <군산 양키시장>이 대표적인 장소다. 직접적으로 ‘양키’를 공식 명칭 안에 썼다는 데서 시대적 배경을 추측할 수 있었다. 송탄의 미군부대 앞 중앙시장 정도의 분위기를 상상했으나, 군산 양키시장은 중앙시장과 사뭇 달랐다. 큰 옷을 파는 가게들 외에는 운영하는 가게가 많지 않았다. 한때 미군들이 출입했을 법한 유흥업소들은 폐업했거나 영업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 방치되어 있었다. 원래 군산 양키시장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생계를 유지하려고 군산 미군 비행장에서 흘러들어온 군수품을 사고팔면서 상권이 형성되었다. 기록만 봐도 그 당시에는 엄청난 호황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군용물품을 판매하지만, 예전 명성에 비해서는 많이 초라한 분위기였다.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지 않아, 몰락한 유흥가의 면면을 관찰하며 살아있는 역사를 관람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군산 양키시장과는 달리 <군산공설시장>은 기존의 재래시장을 신식 구조로 재개발하여 찾은 손님도 꽤 많았다. 전체적인 구조는 노량진수산시장의 형태와 대동소이했다. 3층의 마트형 건물로 새롭게 건축해 기존 상인들이 1, 2층에 입주했으며, 1층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공간에는 1918년부터 현재까지의 시장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관광객들을 위한 쉼터와 청년창업 인큐베이터센터를 권장하는 2층에는 ‘물랑루즈’라는 청년몰이 입점해 있었다. 초기 기획했던 이벤트의 흔적들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공실로 놀리는 점포들도 적지 않았다. 지역마다 우후죽순으로 생긴 청년창업몰은 이제 유치보다는 지속적 운영에 포커스를 맞춰야 되지 않을까. 답보상태로 근근이 버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시장 정문 앞에는 ‘100년 전통’의 순대 국밥 거리가 조성되었는데, 정형화된 간판과 외관에서 신뢰감을 잃었다. 차라리 나는 제대로 된 군산의 순댓국을 찾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호떡가게를 찾아갔다. 군산공설시장 동문 근처에서 가까웠다. 과연 이 동네에 호떡가게가 존재할까. 발걸음 내내 의심을 가득 안고 끝까지 인내하며 도착했다. <중동 호떡>은 기름지지 않았다. 인도의 전통 빵인 난 안에 뜨거운 시럽을 넣은 비주얼이었다. 주로 포장 손님이 많았지만, 길거리 음식처럼 종이컵에 넣어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한 개씩 구매도 가능했다. 정말 달았다. 뜨거워 입안에서 한동안 저글링 했다. 입안의 단맛을 머금은 채 항구 쪽으로 향했다.
군산의 맥주가 심상치 않다. 최근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맥주산업 박람회’에서도 군산시는 대규모 부스를 제작해 군산 맥주의 홍보에 박차를 가해 맥덕들 사이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었다. 군산 현지에서도 군산 맥주를 한자리에서 마셔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군산비어포트>다. 중공업이 한창 활황기일 때는 군산 항구인 죽성포(일명 째보선창)가 북새통을 이뤘다고 한다. 현재 그 명성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당시 지어졌던 건물들이 흉물로 전락한 가운데 옛 수협 창고를 개조해 지금의 맥주 펍이 완성되었다. 올해 3월에 오픈한 이 펍은 국내산 맥아와 쌀을 원료로 제조한 군산 수제 맥주를 판매한다. 맥주를 제조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양조장과 군산의 4개 맥주 양조장 부스, 큰 홀이 마련되어 있었다. 묵직한 출입문을 열자마자, 끓고 있는 맥아 향이 묵직하게 코끝을 강타했다. 큰 통유리창을 관통해 보이는 푸른 바다 위 정박한 어선들이 이 펍의 뷰포인트다. 밤에는 또 얼마나 낭만스러울까. 최근 국내 수제 맥주시장이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끼었던 거품이 사라지고 있다. 차별화된 새로운 전략을 짜서 대비해야 하는 국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군산은 수제 맥주 도시 브랜딩을 세우는데 꽤 진심인 것 같았다.
맥주를 마시고 나와 택시를 잡았다. 군산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범상치 않은 폐건물과 대형 우편함을 발견했다. 당장 갈 목적지가 있어서 잊지 않으려 메모할 만한 키워드를 찾았다. ‘군산 196’. 몇 시간 후, 한동안 잊고 있다가 암호 같은 ‘군산 196’이 떠올라 얼른 지도 앱을 열어 무작정 찾아갔다. 담벼락이 먼저 허물어졌는지, 아니면 태극기가 그려지고 담벼락이 무너졌는지 모를(건물의 연식을 봐서는 전자의 경우가 유력하지만, 누군가의 제보에 의하면 완성형 태극기 벽화가 먼저라고 했다) 건물과 그 주변의 오브제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 벽화 옆에, 강득구 전 권투선수의 벽화 옆에, 군산역 벽화. 출입이 통제되어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신 이 건물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장미동 구 일본인 창고’. 군산에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창고 건물이었다. 1930년대에 페인트, 철물 등을 주로 판매하였던 정부 소유의 적산 건물이라고 적혀 있었다. 영화 <신세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누아르 영화와 너무 찰떡인 분위기였다. 이 폐건물 옆에 또 다른 건물. 전시관과 카페가 있는 <해망로 196> 적색 건물은 출입할 수 있었다. 특이하게 1층에는 골동품 판매장인 ‘군산 옥션 196’이, 2층은 갤러리와 만화방이, 3층은 바닷가가 보이는 카페로 구성되어 있었다. 2층에는 정말 별의별 골동품들이 전시되어 언제 올지 모를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전체가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는 박물관으로 점령당했다.
‘군산 196’과 비슷한 스토리텔링을 말하는 카페를 찾았다. 우리나라 경제를 수탈했던 일제 강점기 때의 무역회사인 미즈상사. 그 회사가 설립한 건물에서 현재는 커피를 판매하고 있었다. <미즈 커피>의 1층은 보통 카페의 홀과 다를 바가 없지만, 2층은 다다미방으로 신발을 벗고 이용할 수 있었다. 나눠져 있는 방마다 분위기가 달라 손님이 많지 않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앉아보게 되었다. 근대역사박물관과 장미 갤러리가 이웃처럼 붙어 있어서 잠시 쉬다가 다음 일정을 조율하기 좋은 카페였다. 2층 방 하나는 북 카페로 운영 중이라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커피 맛보다는 2층의 매력적인 공간을 추천하고 싶은 카페다.
아무래도 미즈 커피에서 마신 커피가 아쉬웠다. 연이어 카페를 가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대각선 맞은편에 폐공장을 개조한 카페가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올드 브릭 Old Brick> 카페는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하는 창고형 카페였다. 커피 가격도 압도적이기도 했다. 시그니처 메뉴 중에 하나인 ‘브릭 슈페너’를 주문했다. 카페 이름은 오래된 벽돌로 지어진 건물의 형태를 따서 지은 듯했다. 미즈 커피가 다다미방 특유의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라면, 올드 브릭 카페는 층고가 높고 플랜트도 큼직큼직해서 기운 자체가 달랐다. 이 카페는 내부도 매력적이지만, 후문 뒤 야외 공간이 더 백미였다. 철제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꿈에 그리던 루프탑이 나타났다. 군산 시내를 훤히 바라보며 미리 아이투어를 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뉴욕의 브루클린이, 누군가에게는 런던의 브릭레인을 꿈꾸게 했다.
영화 같은 동네에 로컬 마켓이 있었다. 군산 영화동 영화 타운은 겉보기에는 단순한 청년몰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디테일한 조직이 숨어 있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민간이 합작해 운영하는 곳이었다. 정부가 전체적인 틀을 짜고 입주업체를 공모하는 형태가 기존의 모델이었다면, 영화 타운은 공간의 기획과 설계부터 공간 창업자를 선정해 정부와 함께 만들어가는 구조였다. 북문을 통해 마켓으로 들어섰다. 유명한 <안젤라 분식>이 나왔다. 여느 분식집과는 다르게 ‘잡채’가 메인 메뉴였다. 그 밖에 김밥, 떡볶이, 오뎅이 메뉴의 전부였다. 한식 테이블에 나오는 잡채가 아닌 쫄면 형태의 비주얼이 등장했다. 따뜻한 비빔 잡채로 상상하면 될 것 같았다. 분식집에서 얼마 가지 않아 <돈 키호테>라는 파스타집도 문전성시였다. 스페인의 한적한 골목을 가게에 담았다. 마을재생에 참여하는 지역 관리 회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주점인 <럭키마케트>, 마켓 중앙에는 출판 공간이자 갤러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군산의 로컬 콘텐츠 중에 가장 본받을 만한 공간이지 않을까 싶었다.
2박 3일 동안 느낀 군산은 여러모로 ‘실험적인 도시’였다. 일제의 잔재들을 철거하지 않는 발상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내면에는 오랜 시간 동안의 갑론을박이 있었겠지만, 비판적인 여론이 지배적이지 않았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문화로서 접근하는 시선이 많았다. 물론 필자 또한 여행자로서 일본을 배척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일본 툭유의 아기자기한 바이브에 매료되어 때가 되면 여행을 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슬픈 과거를 잊지 않고 조심스럽게 도시를 재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군산은 비극적인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는 곳이기에, ‘다크 투어리즘’을 실현하고 있는 도시가 아닐까 싶었다. 실제 미학적 기준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너무 아름다웠다. 또한 보통 관광지와 현지인이 사는 터전은 나눠지게 마련인데 군산은 혼재해 있는 모습이 꽤 조화로웠다. 군산은 입지적인 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어서 청년들의 유입이 쉽고, 그들이 행하는 여러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였다. 여전히 완성형이기보다는 리빌딩의 모습이 강했다. 다른 지역의 사례를 그대로 받아들여 베끼는 것이 아니라 지역만의 특성과 감각을 찾아 해법을 찾아가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군산이 지니고 있는 자원을 십분 발휘해서 현재진행형인 도시재생을 훌륭하게 마무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