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합문화공간 F1963
부산 망미동, 초대형 월마트가 거대한 진지를 구축한 자리 옆으로 낯선 풍경 하나가 서 있다. 낡은 철골과 공장 지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로운 숨결을 품은 공간. 고려제강의 옛 수영 공장이 문화의 옷을 갈아입고 탄생한 <복합문화공간 F1963>이다. 이름 속 1963은 고려제강의 설립연도. 산업의 기억을 지워내지 않고, 그 뼈대를 살려 문화적 자산으로 잇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월마트 쪽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부산 현대모터스튜디오. 자동차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디자인과 예술로 브랜드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실험 공간이다. 전시의 주제는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Do You Miss the Future?”—미래가 그리우냐고? 정작 나는 미래보다는 지나간 과거가 더 아련했다.
필로티 구조로 설계된 전시는 공장 골조와 현대적인 디자인이 교차하며, 시각 예술가·건축가·엔지니어의 상상력이 도시의 내일을 예견하듯 흩뿌려져 있었다. 작품의 문턱은 높았지만, 오히려 가벼운 산책처럼 흘려보는 편이 어울렸다. 바닥에 깔린 재료조차 울산공장의 폐자재를 활용했다니, 과거의 철이 다시금 미래를 묻고 있었다.
공장의 강철 속에 의외의 오아시스도 있다. 햇살이 유리온실을 가득 채우는 Green House & Book. 온실 속 화초처럼 햇살을 받으며 책을 펼치면, 어느새 의식은 광합성을 하듯 맑아진다. 얕은 수면 위에 비친 풍광이 아름다운 달빛가든은 또 다른 쉼표다. 도시의 분주함을 잊고 산책을 하기에 그만이다.
폐공장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공간이 있다. 석천홀. 부산시와 고려제강이 협약해 만든 전시장 겸 공연장이다. 그곳에서 만난 전시는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20주년 특별전 “CONNECTING 아름답게, 전통을 이어 일상으로”. 전통은 구식이라는 고정관념을 벗고, 오히려 현대의 트렌드로 재해석되어 있었다. 술을 연구하는 내 눈은 특히 유기와 그릇에 머물렀다. 일상에 스며드는 전통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미래를 견고히 세울 또 다른 설계도처럼 보였다.
석천홀 옆 국제갤러리에서는 문성식 작가의 “Life 삶”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거친 붓질과 겹겹의 유화는 박수근의 토속적 정서를 닮으면서도, 겸재 정선의 산수화를 오마주하며 새로운 풍경을 펼쳐냈다. 점차 색채가 짙어지며 풍기는 향 같은 착각은, 작가의 삶의 온기를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F1963의 풍경은 예술과 전통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체코 수도원 양조 방식 그대로 맥주를 빚는 프라하 993이 이곳에 뿌리내렸다. 몰트와 홉, 발효 탱크까지 모두 체코에서 공수해온 집념. 주문한 버거와 IPA를 함께 맛보는 순간, 유럽에서 느꼈던 환영이 되살아났다. 짭조름한 패티와 청량한 맥주의 조합은 체코의 기억을 부산의 입 안에서 다시 불러왔다.
또 하나의 술 이야기는 복순도가 F1963. 울산 울주에서 출발해 스파클링 막걸리로 한국술의 스펙트럼을 확장한 브랜드다. 로컬리티를 디자인과 브랜딩에 녹여낸 그들의 전략은 부럽도록 세련되었다. 막걸리의 거품처럼, 부산에서도 그들의 세계는 한층 넓게 퍼져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멈춘 곳은 테라로사 커피. 강릉에서 출발한 브랜드가 F1963에서 꽃피운 공간은, 고려제강의 역사와 테라로사의 철학이 맞닿은 지점이었다. 와이어 설치작품, 재활용 철판, 부품 하나하나가 인테리어로 녹아들며 공업적이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광활한 홀에 놓인 큰 테이블에서 마신 한 잔의 커피는, 철의 냉기를 덮고 꽃처럼 번져가는 향기였다.
F1963은 단순한 복합문화공간이 아니다. 산업의 잔해를 지우지 않고, 그 위에 문화라는 새로운 생명을 심었다. 과거의 철이 미래를 묻고, 전통이 현재를 설득하며, 술과 커피, 빛과 예술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도시 심포니를 이룬다. 부산 망미동, 그곳은 철이 꽃이 되는 기적의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