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 | 온돌 열차에 실려온 군산의 기억

서해금빛열차,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미곡창고 SQUARE3.5








작년 여름, 전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군산은 마치 번외편 같은 도시였다. 전주의 성대한 한옥마을 뒤에 덧붙여진 짧은 챕터, 장미동과 월명동, 중앙동, 신창동 일대를 훑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잠깐의 스침만으로도 군산은 묘한 인상을 남겼다. 전주가 전적으로 관광객을 위한 무대라면, 군산은 로컬들의 생활과 외지인의 발걸음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일본을 건너온 듯한 이국적 풍경 속에서 나는 언젠가 군산만의 여행을 오롯이 계획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벼르고 벼른 군산행의 날이 밝았다.


용산역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탑승한 것은 서해 금빛 열차. 세계 최초의 온돌 마루 열차라는 별칭을 가진 이 완행열차는 이름부터 낭만을 예고했다. 가장 눈길을 끈 곳은 다섯 번째 칸, ‘온돌 마루실’. 9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 편백 탁자와 베개, 등받이 의자까지 갖춘 공간은 작은 다다미방처럼 안온했다. 겨울이나 초봄, 몸을 온기로 덥히며 창밖 풍경을 바라보기에는 더없이 적합하다.


장항선의 차창 너머로는 산과 들, 바다와 갯벌이 교차하며 하나의 파노라마를 이루었다. 시간을 쪼개는 대신 느긋하게 눕는 호사를 누리며, 열차는 천천히 군산을 향해 달렸다. 물리적 시간은 흐르지만, 그 안에서는 오히려 시간이 늘어나는 환상을 맛보았다.


군산역에 내리자 주변은 의외로 휑했다. 허허벌판 같은 역 광장을 뒤로 하고 곧장 향한 곳은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군산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도시다. 기념관에는 당시의 얼굴과 기록이 남아 있었다. 전시를 마주하는 순간, 마음은 숙연해졌다. 몇 해 전 방문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느꼈던 먹먹함이 다시금 몰려왔다. 군산은 단순히 근대 건축의 풍광을 가진 도시가 아니라, 독립의 기억을 품은 도시였다.


전시관을 나서자 하늘은 여전히 울상이었다. 빗방울을 피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옛 양곡창고를 개조한 <미곡창고 SQUARE3.5>. 녹슨 철골과 두꺼운 벽돌 위에 남아 있는 ‘협동생산 공동판매 농협창고’라는 초록색 활자는 빗물에 젖어 더욱 또렷했다. 버려진 공간이 지역의 청년들을 위한 바리스타 사관학교로 거듭났다는 사실은 도시 재생의 모범처럼 보였다. 제빵 공간과 커피 바가 분리된 넓은 홀은 갤러리 같은 품격을 띠었고, 나는 그 넉넉한 공간에서 빗소리와 함께 과분한 여유를 홀로 누렸다.


군산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깊고 묵직하게 다가왔다. 눕는 열차의 안온함에서 시작해, 역사의 엄숙한 기록을 지나, 빗속에서 다시 태어난 창고 카페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는 과거와 현재, 삶과 기억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숨 쉬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군산을 찾는다면, 더 이상 전주의 부록이 아니라, 오롯이 군산만의 챕터로 책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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