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 | 오래된 것들의 속삭임

화담여관, 군산상고, 은파호수공원, 뽀빠이냉면, 신흥동 말랭이 마을








군산 여행에서 내가 가장 공들여 고른 건 숙소였다. 단순한 잠자리가 아니라 이야기를 품은 공간을 원했다. 그렇게 찾은 곳이 <화담여관>이었다. 군산의 한적한 골목, 흰 벽으로 단정히 서 있는 이 집은 1932년 지어진 일본식 가옥이다. 1980년대까지 실제 여관으로 쓰이다가 한동안 방치되었던 건물을 주인이 새로 단장해 2017년부터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다.


1층은 도미토리와 공동부엌으로 꾸며져 현대적이지만, 2층으로 오르는 순간 공기는 달라진다. 나무 계단의 삐걱임, 다다미방의 은은한 향, 상량문에 적힌 집의 내력이 겹겹의 시간을 불러낸다. 저녁이 되면 동네 전체가 숨을 고르듯 고요해져, 숙소 안팎 모두 정숙을 요구한다. 목조건물의 특성 탓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조용히 머물러 달라’는 오래된 집의 예의처럼 느껴졌다. 두 밤을 묵으며, 뜨듯한 다다미방 위에서 나는 마치 옛사람의 꿈 속에 잠입한 듯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군산은 ‘구도의 도시’라 불리지만, 야구 열기만큼은 부산 못지않다. 그 중심엔 <군산상업고등학교>가 있다. 1972년 여름,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9회 말 극적인 역전으로 우승을 거머쥐며 ‘역전의 명수’라는 별칭을 얻은 순간은, 지금도 도시의 집단 기억으로 살아 숨 쉰다.


군산상고 사거리에 들어서면 야구공 모양의 화단이 보이고, 정문까지 이어진 거리는 ‘군산 야구의 거리’로 꾸며져 있다. 역대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은 마치 작은 헐리우드를 연상케 했다. 운동장 전체가 야구장으로 쓰이는 풍경은, 이 학교에서 야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삶의 신앙’임을 보여준다. 군산 사람들의 자존심은 그렇게 흙먼지와 방망이 소리 속에서 길러졌다.


도시의 맥박에서 조금 내려오면, 사랑의 ‘빛’과 풍요의 ‘물’을 뜻하는 <은파호수공원>이 기다린다. 원래 농업용 저수지였던 곳이 이제는 군산 시민의 산책길이자 여행자들의 쉼터가 되었다. 호수 둘레길 9km는 약 2시간 반의 여유를 요구한다. 낮에는 바람과 함께 걷는 시민들의 일상이 흐르고, 밤이면 물빛다리 위로 은하수 같은 조명이 호수를 감싼다. ‘중바우 전설’을 형상화한 다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빛으로 되살리고, 호수 주변의 파전 주점들은 풍류의 시간을 잇는다. 은파는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빛과 물이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거대한 서정시다.


군산에서 맛본 음식 중 가장 특별했던 건 뽀빠이 냉면이었다. 1954년에 문을 연 이 가게는 3대째 이어온 평양냉면집으로, 사골육수에 닭고기를 넣어 끓이는 독특한 방식을 고수한다. 그래서 이곳 냉면은 ‘검은 냉면’이라 불린다. 국물은 구수하고 깊으며, 닭고기 고명이 면 위에 올려져 초계국수와 닮은 듯 달랐다. 처음에는 낯선 향이었지만, 점차 담백함 속에서 은근한 단맛과 고소함이 퍼졌다. 군산의 냉면은 차가운 그릇 속에 닭의 온기를 품은, 이율배반적인 매력을 담고 있었다.


군산의 또 다른 얼굴은 도시 재생의 현장, 신흥동 말랭이 마을이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낡은 주거지 마을을 군산시는 보수해 예술인들에게 레지던스 공간으로 내주었다. 흰 벽을 푸른 물결로 칠한 책방 <봄날의 산책>, 배우 김수미의 생가를 관광지로 꾸민 흔적,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양조장의 그림자는,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이곳의 언덕길은 아직 완벽하게 치장되지 않은 투박함을 지녔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의 결이, 오래된 마을의 진짜 매력일지도 모른다.


군산은 화려한 관광지라기보다, 오래된 것들이 여전히 자기 목소리로 살아 있는 도시다. 여관의 낡은 나무, 야구장의 흙먼지, 호수 위의 빛, 닭고기 향의 국물, 벽화로 덧입은 마을의 벽까지. 이 모든 풍경은 하나의 합창처럼 어우러져 ‘군산’이라는 이름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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