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책방, 통도사
오전에 울주 시내에서 국밥을 먹고 다시 울산역으로 돌아왔다. 서울행 열차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지도 어플을 켜니, 역 남쪽으로 경남 양산의 북쪽 자락이 손닿을 듯 가까이 놓여 있었다. 즉흥의 용기가 발목을 잡아끌어 평산마을로 향했다.
마을로 드는 길은 논머리마다 초록빛을 내는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그러나 평산마을 삼거리 한복판에서 성조기와 태극기가 뒤엉켜 펄럭이고 확성기 소리가 귀를 베는 순간, 고요는 갑자기 거칠어졌다. 그 소란을 스쳐 지나 책방 앞에 닿자, 2023년 4월 문을 연 평산책방이 담담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이 작은 서점은 ‘책과 사람을 잇는 문화공동체’를 꿈꾸며 3,000권 남짓의 장서를 품고 있는데, 그중 1,000권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평생 모은 책들이라고 들었다. 무엇보다도 책방지기로 변신한 전직 대통령이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계산대에 서서 손님을 맞는다는 사실이 이곳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운좋게도 그 약속된 시간이었고, 나는 매대 앞에서 앞치마를 두른 그를 만났다. 떨리는 손으로 책 한 권을 내밀자, 그는 조용히 바코드를 찍어주었다. 사진 한 장까지 허락받고 나니 심장은 더위를 잊은 듯 가벼워졌다. 서가마다 놓인 ‘문재인이 추천합니다’ 코너를 훑으며, 책방이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마을 사랑방이자 작은 문화센터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평산마을을 나와 통도사로 향하는 길목, 무풍한송길의 노송들은 바람에 몸을 비틀며 춤을 추고 있었다. 길이 겨우 1 km 남짓이라지만, 수백 년 된 적송들이 만들고 있는 초록 터널은 세속의 시간을 지우는 긴 묵상 같았다. ‘춤추는 바람 따라 차가운 솔이 물결친다’는 이름 그대로, 솔향을 머금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 길은 통도 8경 가운데 하나로 201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만큼 귀한 숲길이다.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4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며 창건한 사찰이다. 불상을 따로 두지 않고 금강계단 뒤에 사리를 봉안한 대웅전 덕분에, 이곳은 ‘부처의 몸’을 상징하는 삼보사찰 가운데 불보 사찰로 불린다. 1,300여 년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이 절은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고, 오늘도 영축산 자락에 묵직한 고요를 깔아놓았다. 예기치 않은 여정이었지만, 한 권의 책과 한 줄기 솔향은 기차 창밖 풍경처럼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