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지리산 오여사
나 어릴 적, 우리나라 영화가 칸영화제에 진출하기만 해도 언론이 들썩이던 시절이 있었다. 1993년에 제작된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 그중에서도 이례적인 작품이었다. 선불교와 깨달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품은 이 영화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영화였다. 고요한 산사, 수행하는 승려들의 뒷모습, 절제된 장면들. 중학교 시절, 중간고사가 끝난 후 교복을 입고 단체로 영화관에서 관람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당시에는 종교적 가치관도 희미했고,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터라 이 영화에 큰 감흥은 없었지만, 오직 사찰의 풍경만큼은 기억 속 깊이 남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장면들이 떠오르게 한 곳, 바로 화엄사였다. 그리고 이번 구례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 화엄사가 바로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리산 자락, 섬진강의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구례군의 계곡 속. 천오백 년의 시간을 품은 <화엄사>는 그곳에 있었다. 『화엄경』의 세계관을 이 땅 위에 구현하고자 세워진 이 사찰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우리 민족의 사유와 정신이 응축된 살아 있는 역사였다.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에 탐방객들이 몰리는데, 매화가 지고 열매가 맺는 5월 말, 지금 이 시기에는 오히려 조용히 산책할 수 있었다.
화엄의 사상, 곧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진리를 이룬다’는 인드라망의 사유는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흥미롭게도 인드라망이란 개념은 2015년 남원 산내마을의 시골살이학교에 참여했을 때 처음 알게 되었고, 인근 실상사에서도 이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이들을 만난 기억이 있다.
화엄사는 차문화의 성지이기도 하다. 고려 이전부터 이곳 스님들은 지리산 자락에서 자생하는 찻잎을 따 차를 달이고, 차를 통해 수행의 길을 걸었다. '차배'라는 의례는 여기서 비롯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바치는 차의 근원이 이곳 화엄사의 수행 전통이었다고 한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수행 그 자체였다.
점심은 지리산의 맥을 잇는 곳, <지리산 오여사>에서 해결했다. 시장 안 골목에 소박하게 자리한 이곳은, 이름 그대로 오정자 여사의 손맛이 깃든 식당이다. 화려한 외관도, 요란한 홍보도 없지만, 담백하고 정직한 밥상을 대하는 태도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곳이다. 아침마다 재래시장을 돌며 장을 보고, 식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하고, 서빙까지 직접 해내는 그녀는 식당 운영을 ‘공양’이라 부른다. 그 말의 의미를, 음식을 받아든 순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지리산 오여사의 메뉴는 단순히 음식이 아니었다. 지역 특산물을 활용해 창의적으로 구성한 건강한 요리들. '우리들깨칼국수'는 직접 간 들깨를 넣은 국물에 깊이가 있었고, 멸치와 다시마로 낸 육수는 자연 그대로의 맛을 전했다. 산수유로 만든 특제 소스를 곁들인 '구례산수유돈가스'와 '산수유치즈돈가스'는 달콤쌉쌀한 맛이 입맛을 돋우고, '산수유닭가슴살가스'는 저지방 고단백이라는 말보다도 정갈하고 담백한 맛으로 깊이 남았다.
내가 선택한 메뉴는 '구례라임생선가스'였다. 라임의 청량한 향이 얹힌 이 생선가스는 놀랍게도 생물 농어를 사용했고, 냉장이나 냉동이 아닌, 그날 손질한 생선을 얇은 튀김옷으로 바삭하게 튀겨냈다. 식용 접착제조차 쓰지 않은 그 정직한 조리법은 오여사의 철학과 맞닿아 있었다. 바삭하면서도 부드럽고, 담백하면서도 향긋한 그 한 접시는 지리산의 공기마저 담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