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인현시장
군 제대 직후의 나는, 세상을 다 뒤집을 수 있을 듯한 과잉의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력만 하면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혈관 속에서 불타오르던 시절. 새벽에는 삼육어학원에서 영어회화를, 오전에는 안국동 회계학원에서 수업을, 그리고 남는 시간은 충무로 영상센터 ‘활력연구소’에서 독립영화를 꿈꾸며 보냈다. 청춘이란 불꽃이 사방으로 튀던 그 시절, 센터 직원 누나들과 술잔을 기울이러 향했던 곳이 바로 충무로 ‘인현시장’이었다. 그렇게 나는 시장을 배웠다.
그때의 인현시장은 특정한 단골집이라기보다, 시장 전체가 술잔을 돌리는 무대였다. 영화인, 인쇄소 사람들, 알 수 없는 선후배들이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합석이 되던 풍경. 나는 우러러보던 이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했고, 그렇게 시장은 내 젊은 날의 기억을 품어준 장소가 되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20년. 충무로에 일터가 있는 동생과 오랜만에 인현시장을 찾았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골목을 서성이는 순간, 오래 닫혀 있던 기억의 서랍이 스르륵 열렸다. 기름 냄새와 연기, 칼질 소리는 오래된 시계추처럼 시장의 맥박을 되살렸고, 삐걱 열리는 문틈 사이로 흘러나온 국물 향기는 지난날의 술자리를 불러냈다.
인현시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시장 초입에서 곱창 애호가들을 붙잡아두는 ‘서대문곱창’, 해물 향이 진득한 ‘진미네’의 병어조림, 푸짐한 밑반찬과 돼지물갈비가 일품인 ‘호남식당’, 깔끔한 육수로 손님을 붙잡는 ‘삼풍감자탕’, 닭볶음탕과 계란당면 볶음으로 술을 부르는 ‘실비식당’까지—세월을 견뎌낸 노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첫 술자리는 묵은지 삼겹살 향으로 유혹하던 <영심이네>에서 시작됐다. 이 집은 들기름을 바로 구워주는 두부구이도 추천 메뉴다. 돼지고기가 육즙이 농후한 된장찌개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왔다.이어 2차는 30년 세월을 부쳐낸 <황해도 빈대떡>으로 향했다. 황해도식 부침개 비법이 그대로 살아 있는 철판 위에서, 바삭함은 시어머니의 손맛처럼 든든하게 퍼졌다.
술잔을 내려놓고 택시를 기다리는 길, 시장 입구 옆 슈퍼에서는 아재들이 또 다른 낭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저물어 장막이 내려앉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다시 장막이 걷히며 새로운 시작이 속삭였다. 동료의 동의만 있었어도 속마음을 꺼냈을 것이다. 존댓말로 시작해서 반말로 마무리됐던 인현시장의 술자리 시간이었다. 그렇게 인현시장에서의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이어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