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읍내
때론 시군구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읍면 단위의 지명이 있다. 논산의 강경이 그렇다. 많은 이들이 논산 안에 강경읍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지만, ‘강경’이라는 이름은 젓갈과 함께 전국에 울려 퍼진다. 강경이 젓갈로 유명해진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금강 수운의 요충지이자 대규모 장시였던 강경장이 형성되면서 서해의 해산물과 내륙의 농산물이 집결했고, 장기간 보관과 유통에 적합한 젓갈은 자연스레 특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후기, 강경장은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번성했고 젓갈 거래는 도시의 심장을 뛰게 했다. 수운이 철도의 등장으로 쇠퇴하며 상권은 다소 침체되었으나, 젓갈의 명성만은 꺼지지 않았다. 1997년 시작된 강경젓갈축제는 도시의 상징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며 강경읍의 정체성을 다시 새겼다.
나는 강경이 젓갈의 향으로 가득할 줄만 알았다. 그러나 용산역에서 출발한 새마을호가 강경역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고 나를 맞은 것은 젓갈 향이 아니라 7월의 뜨거운 햇살이었다. 여행의 시작은 역 옆에 자리한 <곰바우식당>에서였다. 6,000원짜리 백반은 계란후라이, 생선구이, 청국장이나 미역국 같은 국물, 그리고 여덟 가지의 반찬들로 차려졌다. 밥과 국은 더 달라면 기꺼이 내어주는 인심까지 곁들여져, 도시가 내게 건네는 첫인사는 소박하지만 든든한 집밥이었다.
강경읍 거리를 걷다 보면 도시 전체가 마치 오래된 책갈피처럼 펼쳐진다. 붉은빛 젓갈 간판들이 연이어 늘어서 있어, 마치 강변의 석양이 골목마다 스며든 듯하다. 그 사이로 솟은 교회의 첨탑은 도시의 맥박을 고정시키며 하늘을 향한다. 낡은 벽돌 건물, 좁은 골목,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글씨의 간판들. 그 풍경은 화려하지 않으나, 상업과 신앙, 삶의 잔향이 겹겹이 쌓여 서정시처럼 은근한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특별한 표식을 만났다. ‘스승의 날의 발원지’라 설명된 강경여중·고등학교였다. 1963년, 청소년적십자단 학생들이 은사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은사의 날’을 만들었고, 이 작은 움직임은 전국으로 퍼져 1965년 정부가 5월 15일을 공식 ‘스승의 날’로 제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학교는 전통을 이어오며, 강경은 교육의 따뜻한 기억을 품은 도시로 남아 있다.
학교 옆으로는 금강과 이어지는 강경천이 흘렀다. 그 위에 놓인 강경 미내다리는 소박한 모습이지만, 오랜 세월의 삶과 이야기를 품고 있다. 과거에는 장터로 향하던 상인들의 발걸음이 다리를 가득 메웠고, 불어난 여름 물결 위에 놓인 다리는 마치 세월의 파도에 걸쳐진 실핏줄 같았다. 지금 다리 위에 서면 금빛 강물이 천천히 흘러가며 오래된 기억을 읊조리는 듯하고, 바람은 난간을 스치며 무수한 이야기들을 은근하게 되살린다.
내가 여태 걸어온 길의 이름은 ‘계백로’였다. 백제의 충절을 상징하는 장군 계백의 이름을 딴 도로로, 강경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강경장이 번성하던 시절부터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주요 동맥이었으며, 지금은 상가와 시장,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강경 사람들의 일상과 기억을 품고 있다. 낮에는 붉은 젓갈 간판들이 생활 풍경을 빛내고, 밤이면 가로등 불빛 속에서 오래된 이야기가 다시 깨어나는 듯하다. 계백로는 충절과 삶, 애환이 겹겹이 새겨진 도시의 대동맥이다.
강경은 젓갈의 도시이면서도, 젓갈만의 도시가 아니다. 시장의 번성, 교육의 전통, 오래된 거리와 다리, 그리고 충절의 이름을 품은 길까지. 강경은 겹겹이 쌓인 기억과 서사가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