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나목도식당
마포 상수동이 한때 서울의 핫플레이스를 대표하던 시기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2013년 무렵이다. 망리단길도, 연트럴파크도 아직 대중적으로 떠오르기 전, 마포에서는 상수동이 먼저 있었다. 평일 오후, 이리카페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타자를 치는 풍경은 당시 ‘힙의 정석’ 중 하나였다. 나도 그 무리에 자연스레 동참했고, 그 즈음 ‘탐라식당’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내가 제주도의 땅을 처음 밟은 건 2014년이었으니, 2013년의 제주도는 내게 완전히 미지의 공간이었다. 제주 음식을 주로 파는 탐라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나는 꽤 긴 시간 고민해야 했다. ‘돔베고기’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막상 접해보면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돼지 수육이었다. 그러나 ‘몸국’은 달랐다. 단어 자체로는 도무지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다.
푸르스름한 국물에 잔잔히 떠다니는 돼지고기와 모자반의 조화는,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살짝 비릿한 향과 진한 국물의 색깔은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한 술 떠먹는 순간 그 모든 선입견이 사라졌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깊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을 채웠다. 담백하고도 묵직한 국물은 섬세한 바다의 향과 고소한 돼지고기 육수의 풍미를 조화롭게 전달했고, 한라산 소주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몸국은 단순한 향토음식을 넘어, 제주라는 땅과 그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담긴 음식이었다. 모자반은 거센 바람과 파도를 견디며 자란 해초이고, 돼지고기는 제주 전통의 돼지잡이 문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 두 재료가 만나 만들어낸 따뜻한 국물은, 타지인들에게는 제주 정서를 체감하게 하는 창이 되었고, 제주 사람들에게는 삶의 리듬을 되새기게 하는 일상의 맛이 되었다.
나는 몸국은 늘 ‘몸국’이어야 한다고 여겨왔다. 다시 말해, 변주 없는 오리지널 몸국만이 진짜 몸국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제주도에 몸국과 순댓국을 접목한 식당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호기심이 동했다. 그렇게 나는 제주 서귀포 가시리 마을에 도착했다.
<나목도 식당>은 현지인의 일상과 손맛이 고스란히 담긴 소박한 밥집이다. 1987년 문을 연 이래 화려함보다 가정식의 따뜻함을 고수해왔고, 지금까지도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꾸준히 운영되고 있다. 허영만 작가의 《식객》에도 소개될 만큼, 정성과 맛은 이미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두루치기다. 1인분 9,000원대의 부담 없는 가격에 푸짐한 양, 그리고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계속 손이 가는 맛’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기 본연의 신선함에 적당한 양념이 어우러진 두루치기는, 밥과 함께 쌈을 싸 먹을 때 더욱 깊은 만족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내가 이 식당에 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순대몸국을 맛보기 위해서였다.
순대몸국은 몸국에 피순대를 더한 음식이다. 진하고 걸쭉한 국물 속에 모자반, 돼지고기, 그리고 피순대가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해초의 바다 내음과 돼지 육수의 구수함, 순대의 진한 풍미가 하나의 그릇 안에서 공존한다는 사실이,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한 술 떠 입에 넣는 순간, 먼저 느껴진 건 따뜻한 국물의 부드러움이었다. 그 뒤를 이어 모자반의 미끈한 식감과 피순대의 쫄깃함이 교차하며 입안을 가득 채웠다. 몸국 특유의 담백하고 묵직한 국물은 제주 바다와 육지가 한 그릇 안에서 만나는 듯한 느낌을 줬다. 여기에 순대가 더해지면서, 전통 몸국의 틀을 비트되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오히려 맛의 폭을 넓혀주는 인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마치 제주도의 오랜 전통 위에 도시적인 감각을 살짝 얹은 듯한 묘한 균형이었다.
순대몸국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먹을수록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피순대가 주는 텁텁한 고소함은 걸쭉한 국물과 만나며 묘한 위안을 주었다. 흔히 국밥이 그렇듯, 이 음식 역시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 속을 다독이고 마음까지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드라이하고 라이트한 제주막걸리와 궁합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