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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필동 | 필동의 주루마블, 노포의 밤을 걷다

중구 필동의 필동면옥, 필동해물, 필동분식









지금은 사라졌지만, 필동에는 한때 중앙대학교 병원이 있었다. 대학 시절만 해도 필동이라는 지명은 낯설었으나, 종종 들려오는 입말 덕에 어느새 귀에 익어버렸다. 나중에 충무로에서 일을 할 때 이곳이 바로 필동이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반드시 필(必)’일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붓 필(筆)’이었다. 조선 시대에 ‘부동’이라 불리던 이름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붓골’로 변했고, 이를 한자로 옮기며 필동이 되었다고 한다. 오래 장사하신 사장님께 들은 이야기였는데, 취중에 흘려들었던 말이 오히려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


필동은 충무로, 동국대 후문, 남산골 한옥마을과 맞닿은 덕분에 오랫동안 골목 주점의 명맥을 이어온 동네다. 전통의 노포 주점과 분식집, 소규모 포장마차 사이사이에 세련된 바와 와인 레스토랑이 끼어들며 상권이 세분화됐다. 전국구 명성을 자랑하는 곳은 아니지만, 언제나 젊음의 체온과 오래된 술잔의 온기가 뒤섞이는 동네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곳에 나만의 ‘주루마블’을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필동’을 고정해두고, 업종이나 분위기가 다른 노포 세 곳을 엮어 하나의 코스로 정한 것이다. <필동면옥-필동해물-필동분식>. 가까이 붙어 있지는 않지만, 도보로 걸으며 술을 식히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좋은 거리였다. 최근 이 코스를 인스타그램에 올리자 아는 누나가 신청해 함께 다녀왔다.


여정의 시작은 <필동면옥>이다. 의정부 평양냉면 계열로 알려진 이 집은 투박하지만 맑은 국물로 술판의 서막을 열어준다. 냉면 한 그릇과 소주 한 병, 여기에 제육이나 수육을 곁들이면 단단한 기초가 쌓인다. 담백함이란 오래가는 힘이라는 사실을 국물이 일깨워준다.


2차는 남산 오르막길 위에 자리한 <필동해물>이다. 낡은 항구 같은 간판과 좁은 천장, 촘촘한 테이블 사이에서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번진다. 기본으로 나오는 홍합탕은 1차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모둠 해물은 바다의 단면을 그대로 접시에 옮겨놓은 듯 풍성하다. 쑥갓과 미나리, 매운 고추와 마늘, 초장이 만들어내는 맛의 오선지가 소주잔을 부드럽게 채워준다. 마치 해풍이 스며든 작업장 그늘 아래에서 마시는 술처럼 짭짤하고 진득하다.


마지막 3차는 <필동분식>이다. 이름만 분식일 뿐, 사실은 꼬치와 연탄불이 주역인 노포다. 여사장님은 여전히 연탄불 앞을 지키며 꼬치를 굽는다. 불꽃이 닭살의 결을 읽어내는 손길은 장인의 연주 같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어묵탕은 속을 덮어준다. 달큰한 간과 숯 향이 켜켜이 쌓인 닭꼬치가 술을 부르고, 때로는 닭발, 똥집, 메추리알, 은행구이까지 등장해 소박한 선술집의 리듬을 완성한다. 이 집의 진짜 매력은 ‘분식’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 있는 오래된 유머와 꾸준함에 있다.


코스는 여기서 끝나지만, 아쉬움이 남는 이들을 위해 바로 옆에 극동호프와 그린호프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번외편까지 완성하고서야 비로소 귀가했다. 필동 주루마블 코스를 완주한다고 해서 필동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술을 사랑하는 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한 과제다. 아니 반드시(必) 와야 한다. 오래된 동네의 이름은 기억 저편에서 붓끝처럼 번져오고, 골목의 술잔은 세월의 결을 부드럽게 닦아낸다. 필동의 밤은 그렇게, 기억과 현재를 오가는 주루마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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