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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혜화 | 기억의 숲, 비 내리는 대학로의 풍경

연극 <기억의 숲> 관람









비가 내리는 대학로를 떠올리면, 단연 가장 먼저 스쳐가는 기억이 있다. 복학생 시절, 연기를 배우겠다고 극단에 들어갔다. 혜화로타리에서 혜화초등학교로 향하는 왕복 2차선 도로 앞, 지하에 있던 연습실은 늘 습기로 가득했다. 한여름이면 습도는 120%에 육박했고, 바닥 매트에는 물방울이 흥건했다. 그곳에서 연습을 하면,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연기에 몰두하다 깨진 거울에 팔꿈치를 부딪혀 피가 철철 흘러도, 그것마저 땀으로 착각할 만큼 몰입했던 시절이었다.


오랜만에 대학로 소극장을 찾는 길,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굳이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 빗방울이 옷깃을 적시는 감각이 오히려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한층 생생하게 했다. 같이 관람할 영은이가 ‘지즐소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티켓을 받고 남은 30분의 공백은 술자리로 채웠다. 극을 보기 전 맥주 한 잔으로 마음을 풀어내며, 우리만의 작은 의식을 치른 셈이었다.


오늘의 연극은 <기억의 숲>. 무대 위에는 단 세 명의 배우가 올랐고, 극은 약 90분간 이어졌다. 무대 디자인에서부터 분위기는 결코 밝지 않았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옅은 회색 안개 속에 번지는 초록빛, 그리고 순간마다 스쳐 가는 금빛 햇살 같은 느낌이었다. 극이 시작하고, 대사 하나하나를 집중하며 들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마치 안개 낀 숲길을 걷는 듯한 긴장과 호흡으로 극을 따라갔다.


커튼콜이 끝난 뒤에도 마음은 무대 위를 서성였다. 극 속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잊었던 감정과 외면한 진실을 마주했다. 그 과정은 우리에게 ‘기억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등불’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순간순간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모호함이 더 큰 깨달음을 안겼다. 우리가 애써 잊으려 했던 순간들이야말로 우리를 붙잡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뿌리임을 알게 되었다.


연극이 전한 메시지는 명확했다. ‘잊음’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숲이 길을 가려도,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듯 기억 또한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동반자였다. 기억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다시 걸어 나설 수 있는 작은 쉼터였다. 물론 내가 이해한 것이 정답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작품을 본 뒤 느낀 바는, 해석의 정오를 떠나 오롯이 내 감정의 권리이기에 소중하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뭐 하겠는가.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주변을 검색하다가 영은이가 매콤한 걸 먹고 싶다고 해서 성균관대 정문 근처에 있는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술을 주시나>란 주점을 찾아갔다. 주점 이름만으로도 이미 이야기를 품은 곳이다. 여기는 몇 달 전, 아는 동생들이랑 갔었다가 마음에 꽂혔었다. 흔하지는 않지만, 완벽한 문장으로 구성된 주점 상호명에 후한 점수를 준다. 역시나 먹고 나오면 다시 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매콤한 안주를 앞에 두고, 방금 본 작품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풀리지 않은 물음표들은 서로의 언어로 다듬어지며 조금씩 해소했다. 문화생활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공연이 마치 음원의 녹음이라면,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마스터링에 가깝다. 그렇게 뒷이야기까지 나눠야 비로소 내 안에 영감으로 자리한다. 기억을 품고, 잊음을 새기며, 우리는 다시 삶의 무대 위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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