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소백산 뜰 안에> 펜션
영주에서의 둘째 날 늦은 오후. 500년 세월을 지켜온 송림 아래,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금선정 계곡에서 물놀이를 마친 우리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허기를 느낀 채, 숙소로 향하는 길에 마트에 들를 이들과 곧장 산으로 들어갈 이들이 갈렸다. 나는 후자였다.
차는 좁은 산길을 따라 소백산 깊숙이 스며들 듯 천천히 올랐다. 금계천이 은빛 비단처럼 흘러가는 옆길을 따라 오르자, 마치 현실에서 벗어나 비밀스러운 산장의 품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국립공원 야영장에서의 검문은 일상과 환상을 가르는 문지방을 넘는 의식 같았다. 더 가파른 길을 올라갔고, 내비게이션조차 멈춘 지점에서,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손짓 하나가 길을 열었다.
멀리서는 성별조차 분간되지 않았던 파마머리 인영은 가까이 다가서니 온화한 미소의 주인장 아저씨였다. 그렇게 우리는 <소백산 뜰 안에>라는 이름의 펜션을 발견했다. 산 중턱에 숨겨진 이 집은 마치 소백산이 품은 뜰 속으로 불려 들어간 듯, 우리 발길을 비밀의 정원에 닿게 했다. 거칠고 긴 여정 끝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의외로 오랜 안식의 품이었다.
주인장은 하루 전 손님들의 실수로 전력에 문제가 생겼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우리에게 내어주는 환대는 지극히 정성스러웠다. 방 배정 문제로 여성 멤버와 다소 실랑이가 있었으나, 우리 여성 멤버의 고집이 한수위여서, 그의 오지랖은 일정 선에서 멈췄다. 마치 누군가—아마도 딸의 충고—가 선을 그어준 듯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마음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마트를 다녀온 이들이 합류하고, 우리는 저녁 준비에 나섰다. 숯불을 부탁드리자, 아저씨는 단순히 준비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직접 고기를 구워주시기까지 했다. ‘간섭’과 ‘배려’ 사이를 오가는 그의 태도는 묘하게 우리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러던 중 내가 물었다. “국립공원 검문을 통과해야 들어올 수 있는 이곳에, 어떻게 펜션을 운영하시나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치 시험에 나오길 기다리던 문제를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이야기는, 단순한 펜션의 역사를 넘어선, 땅과 사람, 신화와 운명의 서사였다.
옛사람들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사람을 끝내 지켜낼 은밀한 피난처를 상상했다. 이를 ‘십승지(十勝地)’라 불렀다. 풍수와 도참사상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지리산 깊은 골짜기, 충북과 강원의 험준한 산세, 남도의 들녘 속에 열 곳 남짓 전해 내려오는 땅들이었다.
그 가운데 영주의 금계리는 금빛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앉은 자리 같았다. 사방의 산맥은 장막처럼 바람을 막아주고, 금계천의 물결은 다정히 사람살이를 감싼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 펜션도 바로 그 십승지 위에 세워졌다고 했다. 누군가의 조상들이 이 땅을 사서 대를 이어 물려받았고, 주인 아저씨가 약 10년 전쯤 다시 이어받아 펜션을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술잔조차 잊게 만들 만큼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산이 간직한 은밀한 설화가, 불빛 아래서 다시 숨결을 얻었다.
식사가 끝나자 아저씨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 펜션 아래층에서 아내가 머문 곳으로 갔다. 이 숙소는 연식이 좀 된 건물이었으나 묵은 때 하나 없이 반짝였고, 손님이 떠난 뒤에는 언제나 진심으로 청소한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첫인상의 경계심은 온데간데없고, 우리 마음은 따뜻하게 풀어졌다.
이윽고 방 안에서는 새로운 술자리와 게임이 이어졌고, 기억은 흐릿해졌다. 그러나 다음 날, 사진과 영상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순간들이 우리를 다그쳤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처럼, 잊었다고 여긴 시간은 다시 살아났다.
소백산 뜰 안의 그 밤은 단순한 숙박이 아니라, 낯선 땅에서의 은밀한 만남이자, 오래된 신화가 일상의 불빛 속에 되살아난 경험이었다. 산이 품어 준 뜰 안에서 우리는 안개 같은 시간의 경계에 서 있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 이야기는 여행의 풍경만큼이나 오래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