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didier>, <임실창고1964>
오늘도 처음 만나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 도시의 아침은 한 가지에서 시작된다. 역 앞 노점의 손마디는 그 산물을 고르는 법을 알고, 시장 골목의 습기는 그 냄새를 닮아 있다. 바람은 하천을 따라 올라와 껍질을 뒤집듯 광장을 훑고, 오래된 간판의 벗겨진 글자 사이로 스며든 볕은 그 산물의 색을 도시의 빛으로 바꿔 놓는다. 버스 정류장의 학생이 소리 내어 그 이름을 읽고, 빵집 주인장은 반죽에 그 향을 한 줌 섞는다. 모였다 흩어지는 사람들의 시간표도 계절의 수확에 맞춰 조정되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냄비에서 같은 끓는 소리가 서로를 불러낸다. 이곳의 역사는 박물관 유리진열장보다 장날의 손짓에, 현수막보다 사투리의 억양에 오래 산다. 한 도시는 이렇게 한 가지로 복수의 얼굴을 얻는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부르고, 누구와 나누는가—그 질문의 대답이 여기서는 하나의 맛, 하나의 색, 하나의 이야기로 응고된다.
임실은 치즈의 고장이다. 그 문장을 여권의 입국 도장처럼 마음에 찍고 임실역에 내리자, 우유빛 안개가 둔덕을 넘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침 햇살은 버터처럼 얇게 펴져 들판을 윤나게 닦고, 건초의 달큰한 숨이 골목의 호흡을 데운다. 이 도시는 급행열차가 아니라 숙성실의 온도계로 움직이는 듯, 셔터 오르는 소리마저 미세하게 발효된다. 돌담은 오래 숙성된 껍질처럼 거칠고 따뜻해 손바닥에 촉촉한 과거를 남기고, 하천은 유청 같은 빛으로 다리 밑을 맑게 비워 준다. 양조사인 나는 ‘숙성의 도시’에서 동향인을 만난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
지도를 열어도 길보다 먼저 풍경의 냄새가 읽히고, 표지판이 아니라 바람의 맛을 따라 걷게 된다. 고개를 들면 빛이 치즈 표면의 미세한 균열처럼 지붕들을 촘촘히 갈라 놓고, 그 틈마다 누군가의 하루가 천천히 숙성된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지정환 신부가 있다. 그는 들판의 바람길을 하나로 묶어 마을의 호흡으로 바꿔 놓은 ‘숙성의 사제’였다. 1960년대, 그는 낯선 기술과 느린 시간을 함께 데려와 우유와 염소, 치즈라는 이름으로 가난의 결을 바꾸었다. 협동은 그의 가장 단단한 소금이었고, 신뢰는 이 지방의 체온을 덥히는 은근한 화력이었다. 처음 치즈가 끓던 방의 기억을 간직한 공간 <didier>에 들면, 그의 본명에서 온 그 이름처럼 유럽의 외기와 임실의 흙내가 겹쳐 앉는다. 유리창 너머로는 ‘낯선 것’을 ‘우리의 것’으로 발효시키던 손놀림이 아직도 먼지처럼 떠다니는 듯하다. 지정환 신부의 입지는 역사적 표지석이 아니라 생활의 장치였다.
여행자인 나는 <임실창고1964>의 문을 미는 것으로 그 장치를 체감했다. ‘고다치즈커피’ 한 잔과 ‘토굴빵’ 한 조각. 컵 가장자리의 노란 기름막이 빛을 받아 반짝일 때, 커피는 고다의 둥근 향을 등에 업고 혀 위의 지형도를 다시 그린다. 토굴 모양의 껍질을 두른 빵은 땅속 숙성의 서늘함을 결에 저장해 내민다. 한 모금과 한 입 사이로 지나간 세월이 얇은 필름처럼 끼어들고, 나는 임실의 골목을 걷듯 잔의 가장자리와 빵의 지층을 더듬는다. 여기서 맛은 기록이고, 향은 연대기다. 치즈의 나라라 불리게 한 한 사람의 결심이 오늘의 디저트 위에 얹히며, 여정은 스푼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떠나려다 돌아보면, 도시 전체가 커다란 저장고처럼 한숨의 온도를 간직한 채 나를 다시 부른다. 임실의 아침이 또 한 번, 한 가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