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 <룻 ROOT>
미술관 벽 한가운데, 투명한 한 방울이 걸려 있다. 김창열 작가는 그 방울에 세계를 녹여 넣었다. 표면은 맑지만 속은 비어 있지 않다. 빛과 그림자가 엇갈리는 곡면에 주변이 비치고, 시간이 머문다. 그는 그 방울을 반복해 그렸다. 반복은 습관이 아니라 의례이며, 의례는 서서히 감정을 소거한다. 내가 술을 빚을 때, 쌀을 백 번 씻으면서 하는 의례와 다르지 않다. 그렇게 남는 것은 무(無)다. 그러나 무가 공허라는 뜻은 아니다. 비워낸 자리에야 비로소 본질이 드러난다. 김창열의 물방울이 거듭될수록 화면은 조용해지고, 조용해질수록 더 많은 것을 품는다. 물은 기억을 닦아내고, 남은 광택이 우리를 응시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바로 뒤편, 안국의 골목을 지나 한옥 문턱을 넘으면, 또 한 방울의 투명함을 만난다. 이름부터 반전된 룻—‘술’을 거꾸로 쌓아 올린 말이다. 발상의 전환은 곧 시선의 전환이다. 익숙한 식문화를 되돌아보며, 전통주와 한식을 새로 엮어냈다. 나는 다른 일행보다 먼저 주점에 도착했다. 혼자 뻘쭘하게 앉아 있기 뭐해서 잔술을 주문해 고요함을 안주삼아 술을 음미했다.
잔술은 한 모금의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고, 한 접시는 계절과 산지의 맥락을 되살린다. <룻>의 150종에 이르는 전통주 라인업은 선택을 풍성하게 하지만, 그 목적은 결국 하나의 경험으로 수렴한다. 술·음식·공간이 서로의 여백을 존중하며, 주객은 그 여백 사이로 자신의 속도를 찾는다. 그 순간 다른 일행들이 속속 출입문을 열고 자리를 채웠다. 이제 본격적으로 <룻>의 본질을 탐구했다. 술을 전달하는 한국술 소믈리에의 디테일한 소개 덕분에 청각적 미학도 추가되었다.
물과 술은 둘 다 투명하다. 그러나 둘의 투명함은 성격이 다르다. 물은 씻어 없애는 투명함이고, 술은 드러내는 투명함이다. 물이 흔적을 지우듯 마음을 비워낸다면, 술은 미세한 향과 맛으로 감각을 깨운다. 전자는 ‘소거’의 미학, 후자는 ‘재맥락화’의 미학이다. 그런데 두 길은 의외로 같은 곳으로 이어진다. 과잉을 덜어내어 핵심을 드러내는 일, 바로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김창열은 물방울 안에 ‘무’를 거듭 새겨 넣으며 존재의 핵을 더듬었고, 룻은 ‘술’을 거꾸로 세워 전통의 핵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했다. 한쪽은 철학의 투명성으로, 다른 쪽은 미각의 투명성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본질에 다가섰다. 아마도 이 공간을 운영하는 민준호 이사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김창열은 내 최애 목록의 윗자리를 오래 점거해 온 사람이다. 그의 물방울 앞에 서면 마음의 표면장력이 조금씩 달라진다. 미술관을 나와서도 여운은 금세 마르지 않았다. 혼자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방울의 언어를 내 말로 번역해 보았다.
우리는 오픈해서 마감하는 시간까지 가득 채웠다. 공간이 주는 긴장감이 존재했다. 그 긴장감을 풀기 위해 인사동 주막에서 2차 술자리를 가졌다. 매장 마무리를 하고 돌아온 준호와도 새로운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우리는 무언가의 진심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또 다시 여백으로 남았다. 하지만 더 돈독해 진 건 확실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