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록다방>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기억의 다이얼을 천천히 돌리면, 2006년 9월 27일의 불빛이 먼저 걸려든다. 추석 연휴 직후 상영관에 걸린 영화 한 편은 첫 주 21만에서 2주 차 64만으로 튀어 오르며, ‘입소문’이라는 아날로그식 확성기를 타고 계절의 온도를 바꾸었다. 라디오를 좋아한 언론학도였던 나는 그때 일찍이 스크린을 만나 주변에 추천 독려를 했던 사람이었다. ‘재밌고, 유쾌하고, 감동스럽고, 소박하다’—마치 네 개의 파장으로 이루어진 신호처럼,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남겼다. 안성기와 박중훈이 환상의 호흡으로 연기할 때면, 관객석에서는 오래 닦은 라디오의 볼륨이 한 칸 더 올라갔고, 노브레인의 짧고 분명한 리프는 장면 사이사이에 채널 광고처럼 꽂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망가지지 않는 몇 줄의 멜로디와 몇 장면의 표정이 내 안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그 영화가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스크린 속 장소를 따라가다 보니, 영월이라는 지명이 내 일상의 가장자리로 흘러 들어왔다. 2018년, 아는 동생이 독립책방을 연다며 전한 초대는 나를 처음으로 그 도시로 불러냈다. 사방을 산이 감싸 안아 공기가 묵직하고, 강은 비단처럼 몸을 낮춰 마을을 감싸 흘렀다. 오래된 간판과 낡은 벽이 세월의 겹을 고요히 드러내는 골목을 걷다 보면, 파문처럼 번지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신 결을 남겼다. 영화의 핵심 촬영지였던 옛 KBS 영월방송국은 2004년 말 문을 닫은 뒤에도, 전파의 습기가 벽면에 남은 듯했다. 화면에서는 ‘낡고 빛바랜 듯 정감 가는’ 톤이었고, 실제의 영월은 그 색조를 조금 더 깊게, 한 톤 내린 음으로 품고 있었다.
그 중심에 청록다방이 있었다. 스크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곳은 오래된 라디오의 바늘처럼 미세하게 떨리며 고장을 버텨내는 주파수 같았다. 지금의 청록다방은 시간을 얇게 뒤집어쓴 진공관—비스듬히 비치는 간판, 손때가 눌어붙은 창틀, 유리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쌍화차의 향—으로 여전히 낮은 볼륨의 심장을 튕기고 있었다. 라디오스타 박물관에 재현된 ‘영화 속 청록’은 기억을 호출하는 무대가 되어 현실의 다방과 서로를 비춘다. 사진과 포스터가 겹겹이 붙은 벽 앞에서 업소용 커피잔을 감싸 쥐면, 지난 장면의 대사가 입술 안쪽에서 자동 재생된다. 조명과 각도는 달라졌지만 장소의 리듬은 변하지 않았다. 청록다방은 오늘을 재생하는 아날로그 플레이어였다.
올해, 2025년의 초여름에 다시 영월로 향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여행 크루들이 커피를 찾자, 나는 주저 없이 청록다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추천할 곳이 있어”라는 말과 함께, 비용은 내가 낼 테니 그냥 마음 가는 음료를 고르자고 했다. 메뉴판은 일반 카페와 달라 낯선 이름들이 눈에 더 오래 머물렀고, 선택의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그래도 이 집은 ‘시켜보는 것’까지 포함해 추억이 되는 가격대다. 한때 미니스커트를 입은 노년의 누나들이 공간을 환히 밝히던 풍경은 한결 순해졌지만, 그들의 온기는 다른 방식으로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청록다방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노브레인이 겹친다. 얼마 전 동두천 락 페스티벌에서 오랜만에 그들의 공연을 눈앞에서 보았다. 1996년 홍대의 작은 클럽에서 시작해, ‘조선펑크’라는 토종의 기질로 스테이지를 흔들던 팀. 보컬 이성우—한때 ‘불대갈’이라 불렸던—가 첫 소절을 내지르는 순간, 규율보다 먼저 체온이 객석을 데웠다. 그들의 노래는 늘 단순한 코드에 직진하는 비트를 얹지만, 그 단순함은 오히려 복잡한 오늘을 뚫고 지나가는 가장 짧은 길 같았다. 합창 구절 몇 개만 쥐고도 관객을 같은 편으로 만드는 능력, 외침과 땀이 동시에 얼굴에 떠오르게 하는 그 리듬. 결성 30주년에 이르러서도 에너지는 닳지 않고 오히려 더 잘 연마된 칼날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