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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곡 | 마곡 주류박람회에서의 11시간

코엑스 마곡 주류박람회_양천 <미러볼밥술상>











서울의 서쪽, 마곡은 내게 가깝지만 ‘조금 먼 곳’이었다.

삼성동 코엑스에서 늘 열리던 주류박람회가 올해는 이곳에서도 열렸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난다는 건 언제나 약간의 귀찮음과 설렘을 동시에 품는다.

마포에서 출발한 나는 체감상 한참을 달려 전시장에 도착했다.

목요일 오전의 공기는 약간 느슨했고, 관람객의 발걸음도 성겼다.

나는 천천히 부스를 거닐다가 ‘술아원’의 간판 앞에서 멈췄다.

거기엔 강진희 대표, 그러니까 나에겐 ‘진희 누나’가 있었다.

“누나 이른 시간에 왜 나왔어?”

“상을 준다길래 나왔지. 근데 그게 오전이라니까 짜증이야.”

누나는 벌써 한숨을 내뱉으며 웃고 있었다.

시상식은 끝났고, 멀끔하게 차려입은 아들 승규가 상을 받았다.

‘이제 할 일 다 했다’며 그녀는 정오부터 술을 마시기를 제안했다.


내게 명령이 떨어졌다. “너 술아원 가서 술 하나 가져와.”

부스로 가니 승규가 있었다.

“엄마가 나 술셔틀 시켰다.” 하자, 그는 쿨하게 필40 오크통 숙성 소주 한 병을 내밀었다.

“가장 비싼 건데 괜찮아?”

“어차피 엄마 술이잖아요.”

그렇게 오늘의 첫 병이 결정되었다.

빈속에 40도의 고구마소주를 넘기자, 식도가 뜨겁게 타올랐다.

오늘도 만만치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침 진희 누나한테 일적으로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약 1시간 동안의 술자리가 지속되었다.

술은 대화를 느리게 만들고, 느림 속에서 인간을 솔직하게 만든다.

그 무렵, 내 양조장 부스에서 연락이 왔다.

동료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니 부스로 와달란다.

진희 누나는 태연히 말했다. “그럼 너네 부스 안에서 마시자.”

우리는 또 자리를 옮겼고, 지나가는 지인을 붙잡아 함께 마셨다.

박람회장은 코엑스보다 작아서, 마주침이 잦았다.

술과 사람이 엮이는 데엔 공간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

그날의 마곡은, 마치 오래된 골목처럼 사람들이 부딪히고 웃고 취하는 곳이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우리 부스에서 일어나 주변을 겉돌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준엽이 형을 만났다.

행사장을 떠나려던 형을 붙잡아 다시 시음 코스를 돌았다.

준호를 만났다.

준호가 운영하는 부스에서는 직접 만든 핑거푸드와 한국술을 페어링하며 대접했다.

그때 준엽이 형은 조지아 브랜디를 꺼내들었다.

뚜껑이 열리는 순간, 공기엔 낯선 단내가 번졌다.

테이블 위에 쌓여가는 술병들, 그것은 작은 전쟁터이자 우정의 제단이었다.

술은 그날 우리를 하나로 묶었고, 동시에 천천히 해체했다.

진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잠시 부스로 돌아와 관람객을 맞았다.

그 사이, 진희 누나와 준엽이 형은 광장으로 나가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거기선 지역 특산물 마켓이 열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안주를 조달했다.

내가 다시 합류하자, 진희 누나는 임실 소고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거 사서 구워 먹자.”

주변엔 불판도, 숯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녀의 상상력을 막지 못했다.

술에 취한 사람은 현실보다 욕망의 지형을 따라 걷는다.

행사 마감 후, 우리는 여운을 잇기 위해 신정동의 <미러볼밥술상>으로 향했다.

서쪽 하늘은 이미 검붉게 물들었고, 교통체증 속에서 차창 밖으로 네온사인이 흘러갔다.

도착하니 일행은 이미 주방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주점의 주인인 민중이는 오늘도 ‘잘못 걸린 날’을 맞았다.

우리 같은 진상 손님들이 몰려왔으니까.

진희 누나는 결국 임실 소고기를 사와 구워달라 했다.

민중이는 단전의 인내심을 끌어모으며 불판을 올렸다.

우리는 박람회에서 사온 술과 주점의 신상 술을 번갈아 마시며 밤을 불태웠다.

밤 11시, 나는 겨우 택시를 잡았다.

몸은 술에 절어 있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하루 열한 시간 동안 마신 술의 총량보다, 그 속에서 부딪힌 사람들의 얼굴이 더 진하게 남았다.

누나와 마시는 술은 언제나 시간의 강을 따라 흐른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같은 감정이 남는다.

고마움, 그리고 삶에 대한 묘한 애착.

술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다.

그건 인간의 기억이자, 관계의 온도이며, 감정의 증류수다.

마곡에서의 그 11시간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빚어낸 하루였다.

우리가 만든 술을 마시며, 술은 또 우리를 만들어간다.

그게 인생이란, 끝없이 발효되는 과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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