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비자림>
서귀포 표선면에서 구좌읍으로 향하던 길, 동행자 중 한 사람이 비자림에 들르자고 했다.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라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언론을 통해 여러 번 접한 곳이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마침 경로도 비자림 쪽으로 가까워졌다.
차량의 흐름이 점점 느려지더니, 논란의 중심에 있는 공사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자림로 확장 공사. 제주의 교통 인프라 개선을 목표로 시작된 이 공사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환경 훼손 문제로 큰 논쟁을 낳고 있다. 삼나무 숲으로 유명한 이 도로 주변의 수백 그루 나무들이 베어졌고, 시민단체와 환경운동가들은 공사 중단을 요구해왔다. 멸종위기종의 서식지이자 생태적으로도 중요한 공간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도로 폭이 좁고 통행량이 많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는 없다. 지역 주민들과 제주도 측의 입장도 나름의 절박함이 있다. 나 또한 차 안에서 바라본 도로는 관광지로 향하는 길치고는 다소 협소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보전’ 쪽에 마음이 더 간다. 개발이 필요한 시대라 해도, 그 과정엔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공사 현장은 보기도 좋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비자림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확연히 달랐다. 숲은 묵직한 푸르름으로 우리를 감싸 안았고, 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바닥 위에 비단처럼 펼쳐졌다. 이곳은 단순히 나무가 많은 숲이 아니었다. 천년을 살아온 비자나무들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자림은 세계에서 가장 큰 비자나무 군락지로, 약 2,800그루의 비자나무가 넓은 땅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수령이 800년에서 1,000년. 그 자체로 살아있는 자연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은 마치 오랜 세월의 이야기들을 품은 듯, 조용한 중후함을 자아냈다. 약재로, 귀한 목재로 쓰였던 이 나무는 사람과 오랜 인연을 맺어왔고, 이 숲은 그 공존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었다.
붉은 흙으로 깔린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치 명상의 길 같았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 새소리,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소리를 피해 조용히 걸었다. 군데군데 설치된 안내판도 있었지만, 가장 큰 설명은 나무들이 직접 들려주는 듯했다.
왜 이 숲을 사람들이 아끼고 찬양하는지, 비자림을 직접 걸으며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제주가 지닌 가장 깊은 숨결,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겸허해야 하는지를 배운다. 산책로 한 바퀴를 도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렸다. 경사도도 없어서 딱 걷기 좋은 산책로라 생각했다. 왜 이제야 여길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