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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동두천 | 군생활의 추억을 끌어올린 냉면의 맛

동두천 <평남면옥>









입대 이야기를 짧게 쓰려다 보면 늘 길어진다. 군대는 시간의 길이를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 진공포장기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주에서 군 생활을 했다. 공군으로 입대했고, 특별한 기술이 없는 문과생이던 나는 ‘일반병이면 다 행정병이겠지’ 하는 순진한 추측으로 지원했다. 진주훈련소에 들어가서야 그 믿음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았다. 일반병의 거의 절반이 헌병과 포병으로 빠져나갔다. 공군에 포병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포병으로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이 살갗을 쿡쿡 찔렀다. 급양(취사)병까지 포함하면 행정병으로 남는 몫은 열 가운데 셋 남짓. 나는 그 셋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운이 따라줬다. 기본군사훈련 막바지, 내 특기가 호명되었다. ‘70110 총무.’ 앞의 ‘70’이 들리는 순간 환호성을 삼켰다. 바로 앞줄에서 ‘18(포병)’, ‘80(헌병)’ 번호를 받은 동기들을 보며, 기쁨은 조용히 속으로만 내려앉혔다. 총무 특기 기술학교에 입소한 뒤에는 좋은 자대를 받기 위해 화장실 변기 칸에서까지 주경야독을 했다. 서울 동작구 공군회관은 끝내 내 손에 닿지 않았고, 간신히 ‘In 경기’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양주의 방공포대에 더블백을 풀었다. 포대 행정병, ‘70’ 특기 T.O.는 오직 나 하나였다.

내 일은 간명했다. 비밀문서를 들고 상급부대로 전령을 다녀오는 일, 새로 전입하는 신병을 인솔하는 일, 매주 우체국 사서함에서 편지를 수발하는 일. 부대 밖을 주 3~4일씩 떠돌 수 있었으니 병사에게는 제법 호사였다. 다만 양주에는 마땅한 우체국이 없어 동두천까지 나가야 했다. 그때의 나는 우체국과 부대를 오가며 남의 소식을 옮기는 사람이었다. 타인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내 손으로 들고 다니면서도 정작 내 마음은 종종 비어 있었다. 움직임은 활발했지만 감정은 포장지처럼 매끈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제대 후 몇 번 동두천을 찾았지만, 중앙동에 다시 서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주말, 동두천 우체국 문은 닫혀 있었다. 스무 해가 훌쩍 지난 건물 앞에서 나는 이상할 만큼 아무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다. 매주 드나들던 출입문과 사서함의 금속 냄새, 점심시간의 소란 같은 것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과거의 나에게 미안해졌다. ‘그 시절의 나는 왜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았나.’ 기억은 사소한 바람에도 일어나는 모래먼지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맛이 있다. 내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꼭 가보라고 추천하는 집, <평남면옥>. 평점으로만 보면 호불호가 분명한 곳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집을 권하는 이유는 단 하나, ‘독특함’ 때문이다. 이곳 육수에는 쇠고기 향과 함께 동치미 국물이 굵게 깔린다. 평양냉면의 또 다른 옥타브가 거기서 열린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 환히 맞아주던 집은 아니었다. 주방 안쪽 인기척을 따라 들어가 조용히 주문을 하고, 다시 홀로 자리에 앉았다. 오래된 타일 바닥, 나무 의자, 비슷한 결의 목재로 만든 메뉴판. 카운터 벽에는 권총 탄창처럼 붙은 블루리본 스티커 열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1950년대, 평안남도에서 내려온 피란민이 시작해 지금은 3대에 이른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한 그릇의 국물이 지리와 역사를 관통해 오늘의 식탁에 도착한 것이다. 전령이 우체국을 거쳐 편지를 전달하듯, 이 집의 냉면은 북에서 남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배달된 맛의 편지다.


국물은 맑고 향은 가볍게 코끝을 스친다. 첫 모금은 심심하다 느껴지지만, 곧 동치미 무에서 배어나온 단맛이 올라온다. 달라붙지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 속도의 단맛. 메밀면을 한입 문 순간, 입안에는 육향이 얇게 깔리고, 곡물의 구수함이 뒤따른다. 그때 나는 알아차린다. ‘아, 내가 아직 모르는 평양냉면의 세계가 있구나.’ 그것은 감칠맛을 쥐어짜는 방식의 설득이 아니라, 감각의 폭을 넓혀주는 방식의 초대다. 이 집의 냉면은 맛의 볼륨이 아니라 옥타브를 건드린다.


솔직히 말하면, 내 입에는 다소 달고 조금 심심하다. 내가 선호하는 기준과 다른 방향의 맛이라 순간적으로 판단이 흔들렸다. 그러나 바로 그 어긋남이 나를 붙든다. 취향이라는 고정식 나침반을 잠시 내려놓을 때 비로소 보이는 지도가 있다. 그 지도에서 <평남면옥>은 ‘아주 맛있는 집’이기보다는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집’에 가깝다. 이곳은 식당이면서, 동시에 작은 역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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