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울 동대문구 | 두 번 끓인 우리의 인연

이문동 <이문동그날>









대학생도 학습지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준 사람은 대학교 후배 수민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 학습지가 단지 추억 속 유물로 남은 게 아니라 지금도 그녀의 손끝에서 살아 숨쉰다는 점이었다. ‘구몬학습’—어린 시절 나 역시 엄마의 성화에 밀려 억지로 풀던 눈높이, 빨간펜, 일일공부 같은 그 일일 분량의 숙제들—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수민의 외국어 공부는 시간의 강을 건너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외국어에 약한 체질이라, 문장을 즐기는 그녀의 태도를 마치 먼 별을 올려다보듯 부러워했다.


졸업 후 수민은 코레일에 입사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했고, 그녀는 여행길을 이끄는 철로 위에서 일했다. 가끔, 아주 가끔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그중 한 번은 지금은 폐역이 된 연천의 초성리역이었다. 역장과 수민, 두 사람만이 근무하던 조용한 역. 나는 그곳에 직접 빚은 술을 들고 갔고, 결국 역장님께 선물로 드리고 돌아왔다. 백마고지역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부슬비가 흩날렸던 기억이 있다. 또 몇 년 후, 수민이가 의정부역에 있을 때 철원에서 내려오다 잠깐 들러 짧은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오프라인의 시간은 드물었지만, 온라인에서는 자주 만났다. 우리는 서로의 여행 사진에 댓글을 달며 ‘떠남’이란 행위에 대한 동지애 같은 것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SNS에 낯선 공기가 비쳤다. 외국이었다. 휴가냐고 묻자, 수민은 “안식년이에요”라고 했다. 그동안 고된 회사 생활을 버텨온 그녀에게 주어진 일 년의 시간, 그것은 세상으로부터의 휴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돌아가는 여행처럼 보였다.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자연스럽게 만나자는 말을 꺼냈고, 그녀도 흔쾌히 응했다. 낮술을 마시기로 했다. 장소는 그녀의 생활 반경인 동북권. 그렇게 수민이 고른 식당은 <이문동그집>이었다.


나는 이미 그 식당을 지도에 즐겨찾기해둔 상태였다. 지도를 펼치자 근처에 지인이 운영하는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시저지>. 2011년, 홍대의 어느 클럽 무대에서 관객과 밴드로 만나 인연을 맺은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예고 없이 가는 게 내 방식이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상대로 주연이는 부재중이었다. 대신 동료가 일하고 있었고, 나는 ‘너가 없을 때 내가 온다’는 메시지를 남긴 채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남은 시간을 천천히 태웠다.


<이문동그집>에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했다. 사실은 수민이의 늦음이 10분이었으므로, 결국 내가 일찍 온 셈이었다. 메뉴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곱창전골. 먼저 온 사람의 의무처럼, 전골을 주문해 냄비를 데웠다. 이 식당의 노란 간판이 선명했고, 실내에는 낮술을 즐기는 이들의 이야기와 한우 기름의 향이 어우러져 있었다. 벽면에는 당일 도축 증명서들이 붙어 있었고, 그것들이 이 집의 시간표처럼 보였다. ‘가성비’라는 단어가 이 공간에서는 전략이 아니라 생활의 태도였다. 전골의 국물은 파와 우삼겹이 어울려 투명하게 끓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했어요’라는 메시지가 왔다. 그러나 이상했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머릿속이 스쳤다. ‘설마… 경희대 근처 분점?’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맞았다. 그녀는 또 다른 ‘이문동그집’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서로 상호명만 검색한 채, 주소를 확인하지 않았다. 수민이는 택시를 탔다. 그 사이, 전골은 혼자 끓었다. 나는 자꾸 넘치는 육수를 부어가며 불을 줄였다. 그리고 홀로 소주 한 병을 비웠다. 기다림을 시간 대신 술로 덮었다.


수민이가 도착했다.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별 거 아닌듯 “이런 에피소드 하나쯤은 있어야 오래 기억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끓는 전골 냄비는 마치 오래된 대화의 다시 끓임 같았다. 시간이 조금 식어도, 다시 불을 올리면 향이 진해지는 것처럼—우리의 관계도 그러했다. 엇갈림이 있어야 만남이 더 단단해지고, 기다림이 있어야 한 그릇의 온도가 완성된다. 그날의 곱창전골처럼, 우리의 인연도 두 번 끓어야 제 맛이 났다.






20250909_115108.jpg
20250909_115114.jpg
20250909_115226.jpg
20250909_115230.jpg
20250909_115237.jpg
20250909_115240.jpg
20250909_115357.jpg
20250909_115406.jpg
20250909_115624.jpg
20250909_115950.jpg
20250909_120331.jpg
20250909_121720.jpg
20250909_123206.jpg
20250909_123239.jpg
20250909_123249.jpg
20250909_123258.jpg
20250909_123423.jpg
20250909_123425.jpg
20250909_123545.jpg
20250909_123719.jpg
20250909_123732.jpg
20250909_123742.jpg
20250909_123810.jpg
20250909_123817.jpg
20250909_124134.jpg
20250909_124305.jpg
20250909_124313.jpg
20250909_124333.jpg
20250909_124510.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경기 동두천 | 군생활의 추억을 끌어올린 냉면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