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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 물 위의 밤, 여우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

영주 무섬마을







요즘 단체로 민박집에 묵는다면, 사람들은 으레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떠올린다. 30대 이상의 남녀가 적당히 섞여 있고, 대화의 구조가 어느 정도 짜인 듯 흘러가면, 의도치 않게 그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된다. 우리 코둘 모임은 결혼이나 연애를 목적으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서로를 오래 알아, 감정의 물결이 이미 잔잔히 가라앉은 사이들이다. 그러나 그 잔잔함 안에도 미묘한 파동이 있을지도 모른다—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오래된 관계 속의 여운 같은 것들 말이다.


이번 여행의 행선지는 영주 무섬마을이었다. 이름부터 시적이다. ‘물에 뜬 섬’이라는 뜻의 무섬(毋岑)은, 소백산과 태백산에서 흘러내린 내성천과 영주천이 삼면을 감싸 빚어낸 땅이다. 물이 감싼 자리 위에 집이 서 있고, 시간은 물살을 따라 천천히 흐른다. 우리는 이 마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사실, 이곳은 실제로 ‘나는 솔로’가 촬영되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낮에는 마을 앞 꽃밭에서 프로그램 인트로를 패러디하듯 사진을 찍으며 웃었고, 누가 기혼자이고 누가 미혼자인지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삶의 구분선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관계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다.


짐을 챙겨 <김규진 가옥>으로 향했다. 마을 입구의 안내판에 적힌 역사처럼, 이곳은 17세기 중엽 박수와 김대가 터를 잡은 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이다. 한옥의 처마마다 박힌 별자리처럼 족보는 촘촘했고, 돌담은 세월을 닮아 둥글게 닳아 있었다. 입구에서는 ‘마을 청년들’—시골에서는 예순을 넘어도 청년이라 불린다—이 배추전과 막걸리, 그리고 여름 특산물인 박을 팔고 있었다. 별다른 호객행위도, 장삿속도 없는 그들의 모습이 이 마을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김규진 가옥은 초가의 숨결이 살아 있는 집이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겹집 구조였다. 초가지붕의 용마루 아래로 까치구멍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은 듯, 공간은 고요하게 내 호흡과 맞물렸다. 마구간 자리에 사랑방을 들였던 흔적은 세월의 변화를 품은 한 인생의 단면 같았다. 아궁이가 장착된 방은 겨울에 온기를 제공하기에 충분했으며, 세살문과 낮은 마루는 몸을 낮춰 들어오라 손짓했다. 이곳에서 묵은 이들이 남긴 말처럼, 빠름이 꺼진 자리에서 비로소 ‘한 박자 느림’을 되찾는다는 의미를 나는 천천히 실감했다. 마을이 강물에 둘러싸인 섬이라면, 이곳의 하룻밤은 외부의 소음이 잦아든 뒤 들리는 자기 내면의 물소리였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시장에서 사온 떡볶이와 순대, 닭강정, 영주 막걸리를 늘어놓고 테이블을 채웠다. 대단한 안주가 아니어도, 오랜만의 한옥 밤공기는 술맛을 달게 했다. 예전 여행에서 히트했던 ‘고무탄성밴드’가 다시 등장했고, 선우 형의 몸개그가 다시 이어졌다. 사랑이는 그 기구의 정석 사용법을 알려주며 좌중을 압도했다. 그렇게 웃음과 농담이 이어지다, 여우 그림이 등장했다. 낮에 함께 했던 여우 그리기 체험에서 각자가 그린 그림을 무기명으로 펼쳐놓고, “이건 누구의 것 같아?” 하며 맞히는 게임이 시작됐다.

그림 속 여우는 모두 달랐다. 누군가는 부드럽고 순한 눈빛을, 또 누군가는 교활하고 재빠른 움직임을 그렸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내면의 얼굴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할지 두려웠다. 혹여 그들이 내 여우에서 따뜻함보다 경계심을, 부드러움보다 계산을 본다면, 그것은 내가 세상 앞에서 쓴 가면의 무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인식의 방향이 궁금했다. 그 시간은 결국, 여우의 털결을 따라 내면을 더듬는 일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통해 자신을 비추는 작은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초가의 낮은 천장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연애 감정’이라기보다, 오래 함께한 동료이자 전우로서의 연대감이 있었다. 코둘 모임은 언제나 그랬다—웃음과 진심, 가벼움과 깊이가 묘하게 공존하는 사람들. 무섬마을의 밤은 물 위의 섬처럼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서 각자의 내면이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물에 떠 있으되 가라앉지 않는 마을처럼,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물 위에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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