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해방촌 노가리>
나는 주점의 테이블에서 사장님과 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 자리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삶의 직선이 잠시 곡선을 그린다. 술잔은 질문처럼 돌고, 대답은 웃음이나 맞장구로 돌아온다. 주점 사장님이 들려주는 삶의 단면들은 마치 오래된 철학서의 주석 같다. 고단하지만 지혜로운, 반복 속에서 얻은 통찰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생각한다. 인간의 관계란 결국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마셔주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잔을 채우는 건 술이지만, 비워내는 건 외로움이다.
올여름, 나는 그런 시간의 본질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귀한 주점을 다녀왔다. 술자리는 이미 3차로 접어들었고, 의준이가 추천한 <해방촌 노가리>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이미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영업 중임을 확인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사장님의 말투는 격식이 느슨하고 정이 묻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에게 “오늘도 오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경리단길에서 대리기사를 불러 해방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도착하니 자정에 가까운 시각, 용산의 불빛이 바다처럼 반짝였다. 주점은 그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같았다.
작은 가게 안에는 한 테이블의 손님이 있었다. 우리는 주방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은 이미 피곤해 보였지만, “오늘은 내가 특별히 해줄게요”라며 웃었다. 김치 한 접시가 먼저 나왔고, 그 순간 나는 이 집의 맛을 확신했다. 김치의 숨은 단단했고, 칼칼함 속에도 단맛이 살아 있었다. 손맛이 좋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시간과 성정이 음식에 녹아 있다는 뜻이다. 사장님은 오래된 악기를 다루듯 주방을 오갔다. 반찬 같은 안주가 진짜 안주라는 걸, 그날 다시 배웠다.
영업시간은 이미 끝났지만, 우리와 사장님은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이제 들어가셔야죠”라는 말을 반복하는, 사장님은 맞은편 편의점으로 뛰어가 맥주를 사왔다. 손님을 이기는 주인장은 없다. 그렇게 우리는 가게 앞 데크에 앉아 도시의 잠을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다. 금기시되던 이야기들도 술김에 풀렸다. 대화는 깊었고,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새벽 세 시를 넘기고서야 파주로 돌아갈 의준이를 위해 대리기사가 언덕을 올라왔다. 이제야 사장님도 기지개를 켰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외로움을 덜어내며, 이 도시의 새벽 한 켠을 비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