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 <빈브라더스 커피하우스 서울>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요즘 들어 꽤 ‘별 것’이 되어 버렸다. 의미가 없다고 치부하던 자잘한 장면들에서 오히려 의미가 싹튼다. 밤의 경치, 이른바 야경이 그렇다. 한때의 나는 밤이면 사람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허심탄회한 시간을 보내는 게 최선이라 믿었다. 어둑한 시간에 카페로 향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밤에 약속이면 주점이지, 어째서 카페인가.” 철두철미한 술꾼의 세계관이었다.
마흔 언저리를 지나며 밤을 쓰는 방법이 바뀌었다. 무조건 저녁 약속을 잡아 기분 좋은 취기에 하루를 마감하던 관성은 조금씩 작아졌다. 동료들과의 술자리는 일주일에 서너 번에서 이제는 한두 번으로 줄었다. 남는 밤에는 내가 찍어둔 사진들을 넘겨보며 떠오르는 단상을 글로 적는다. 그리고 혼자 길을 나선다. 운동과 산책의 중간쯤 되는 속도로 걷다가, 문득 멈춰 서서 야경을 본다. 그러면 눈의 피로가 가시는 동시에 마음의 침전물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도시는 낮 동안 욕망과 경쟁으로 숨 가쁘게 돌아가다가도, 밤이 되면 열기를 식히며 스스로를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 된다. 야경을 바라보는 일은 그 거울 앞에 조용히 서는 일과 닮아 있다. 마침 사무실과 집 근처에 한강이 있어서, 맞은편 여의도를 바라보는 날이 많다. 건물 외벽에 박힌 불빛들은 각자의 하루를 살아낸 흔적이자, 고요 속에서 반짝이는 사유의 파편이다. 나는 그 파편들 사이에서 내 안의 소음을 거품처럼 가라앉힌다. 불빛 하나하나가 하루 동안 소모된 정신을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야경은 풍경을 넘어, 나를 다시 세계와 접속시키는 의식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분주함과 고요, 욕망과 성찰이 서로의 자리를 허락하는 법을 그 앞에서 배운다.
어느 저녁, 보람이가 “마포에 야경맛집 카페가 있다”고 했다. 그녀의 지도 앱이 가리킨 목적지는 <빈브라더스 커피하우스 서울>. 내가 알던 빈브라더스는 합정동의 1층 카페, 인더스트리얼한 바닥과 노출 천장이 먼저 떠오르는 곳이었다. “통창 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상수동의 새 건물 6층에 오픈했다는 말을 듣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열리는 순간, 카페 앞에서 서성이거나 앉아 웨이팅 중인 사람들을 보았다. ‘이 밤에 카페 웨이팅이라니.’ 의구심이 목까지 찼다.
그런데 문을 열고 한 걸음 더 들어서는 순간, 내 고집은 말없이 유리창에 걸려 멈추었다. 창 너머로 여의도 불빛이 강 위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 해의 온기가 강물 위에서 천천히 식어 갈 때, 그 유리창은 저녁을 한 장의 악보처럼 펼쳐 보였다. 골든아워의 금빛이 여의도 너머로 사그라들면, 강변북로의 헤드라이트가 도시의 심전도처럼 파동을 그린다. 낮의 맥박이 여전히 뛰고 있지만, 더 고르고 더 깊게 숨을 쉬는 리듬. 옥상에 올라가 잔을 들어 올리니, 머릿속의 잔소리들이 거품처럼 가라앉았다.
유리라는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바깥의 별빛과 실내의 전등이 서로를 비추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 경계 위에서 오래된 나와 오늘의 내가 겹쳐 앉았다. 강물은 검푸른 비단처럼 느릿하게 흐르고, 도시는 그 위에 바늘땀 같은 불빛을 수놓았다. 나는 그 수놓음의 간격 사이로 마음을 접어 넣는다. 내일 다시 펼쳤을 때에도 주름이 예쁘게 남도록.
알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밤을 소비했고, 이제의 나는 밤을 기입한다는 사실을. 술기운이 데리고 가던 밤은 즐거웠지만 금세 사라졌다. 반면 야경 앞에서 적어두는 짧은 호흡과 작은 문장들은, 다음 날의 나를 조용히 호출한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음주생활을 끊는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튼 야경은 내 하루의 끝에 붙이는 서명 같다. 소란 대신 잔향으로 남는 이름, 과장 대신 균형을 찾아가는 획. 그 한 획을 긋고 나면, 나는 다시 낮의 세계로 나아갈 준비가 된다. 밤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별 것’으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별 것’이 내일의 나를 지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