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문화제조창>
모두 세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청주를 찾은 건 2008년부터 족히 열 번은 넘는 것 같다. 태어난 곳도 아니고, 학교를 다닌 곳도 아니고, 일을 했던 적도 없는 도시인데, 발걸음이 자꾸 이곳으로 향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취업 스터디를 같이 하던 김우림이 청주에서 일을 시작했고, 그 후로 그녀의 삶의 계절들이 이 도시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림이는 청주에서 결혼을 하고, 아들과 딸이 이곳 하늘 아래서 자라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 중 한 시즌을, 그것도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켜본다는 건 꽤 뜻 깊은 일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 시즌의 연장선 위에서, 청주 공예비엔날레를 볼 겸, 또 우림이를 볼 겸 가볍게 가방을 챙겨 청주로 내려왔다.
문화제조창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림이는 나를 친절하게 내려주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12시반에 만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혼자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전시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매년 한 번쯤은 꼭 보려고 한다. 광주, 제주, 청주… 도시마다 전시장은 달라도, 내 태도는 늘 비슷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에 얽매이지 않고, 내 감정이 요동치는 작품에 시간을 더 길게 내어 주는 것. 그날도 수많은 작품을 지나쳤지만, 결국 마음에 오래 붙잡힌 건 크게 두 작품이었다.
먼저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구로다 유키코의 <작가의 방>이었다. 마치 작가의 실제 방을 옮겨놓은 듯한 작은 공간에, 낡은 가구와 깨진 그릇, 오래된 소품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깨진 접시의 금이 금박으로 메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방은 ‘정리되지 않은 삶’이 아니라 ‘조심스레 수선된 상실의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리고 새로 사는 게 더 쉽다고 말하는 시대에, 이 방은 굳이 버리지 않고, 깨진 자리에 금을 대고, 떨어져 나간 부분을 기워 넣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처럼 느껴졌다. 물건의 상처를 고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이라는 걸, 작가는 이 어수선한 방 한 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도 한때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버리지 못한 물건들이 떠올랐다. 망가졌지만 손이 가는 것들, 그 안에 박혀 있던 어떤 시간들 말이다.
내 마음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작품은 이시평 작가의 <Log 일지(日誌)>였다. 목재에 녹슨 금속과 쇳가루를 스며들게 하고, 반복적인 움직임을 주어 나무와 금속이 서로 반응하며 시간을 기록하도록 만든, 조형적 가구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무채색에 가까운 덩어리가 조용히 서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목재 표면은 이미 수많은 마찰과 산화를 겪은 흔적들로 얼룩져 있었고, 금속과 나무가 맞닿는 지점에서는 아주 미세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마치 재료들끼리만 알아듣는 작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 작품이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으로 쓰이고 있는 일기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 금속이 서로에게 남기는 흔적들이 날짜 대신 층층이 쌓여 있고, 그 변화가 바로 이 작품의 텍스트가 되는 셈이다. 작가는 서로 다른 물질이 부딪히고, 마모되고, 닳아가며 남기는 과정을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사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대개 ‘결과’만 기억하지만, 이 작품은 ‘변화하는 중’이라는 상태를 존중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문득, 2008년 이후 내가 청주에 올 때마다 적어도 한 줄씩은 내 인생의 일지에 써 내려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줄들 사이에 우림이의 일, 나의 고민, 그때그때의 계절과 날씨가 조용히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전시장을 나올 즈음, 우림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점심시간은 이미 조금 지났고, 둘 다 배가 출출했다. 문화제조창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오늘의 점심’을 토론했다. 사실 전날 우림이는 친절하게도 오지선다 식으로 식당 후보를 보내왔고, 나는 그중에서 한 번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메기민물매운탕’을 골랐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해보니 웨이팅이 너무 길어, 우리는 그 일정을 저녁으로 미루기로 했다. 태안 바닷가에서 쭈꾸미 낚시를 하고 있다는 우림이 동생 커플의 소식도 단체 카톡방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본인의 성과를 빠르게 자랑했을 텐데, 이날은 윤희의 사진만 올릴 뿐, 쭈꾸미 이야기는 없었다. 아무래도 ‘풍년’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림이는 “이따가 그냥 치킨 시켜 먹자”며 이미 결과를 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