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송악산>
제주도 여행에서 아직 안 해본 게 등산이다. 오름을 오른 적은 있지만, 한라산이나 산방산을 등반해본 적은 없다. 한라산을 오르려면 새벽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늘 전날 밤이 요란했기에 한라산만을 위한 시간을 내본 적은 없었다. 대신 한라산 소주를 마시며 밤에 정상 등반은 제주에 올 때마다 잊지 않고 수행하는 나만의 미션이었다.
사계해안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는 산이 한라산과 산방산만 있는 줄 알았다. 송악산이란 이름은 처음 들었다. 온 김에 산 둘레길 코스가 있다고 하여 걷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우산은 손에 들고 맞기로 했다.
송악산은 사계해안에서 시작된다. 높지 않은 오름에 가까운 산이다. 바닷가로 향한 절벽과 둘레길이 어우러져 걷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산 입구에 도착하니, 나무 데크로 이어진 탐방로가 부드럽게 시작을 알렸다. 입구부터 바다 냄새가 옅게 풍겼고, 발밑에는 소나무 그늘이 점점이 드리워져 있었다.
송악산은 화산이 멈춘 자리에 자란 고요한 능선이다. 발아래에는 오래전 용암이 굳어 만든 절벽과 그 아래로 출렁이는 푸른 물결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산길은 둥글고 부드러웠다. 억새밭 사이로 바람이 길을 열었고, 그 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마다 흙냄새와 바다냄새가 차분하게 스며들었다.
산길은 완만했고, 길가에는 파란 수국이 한창이었다. 어느새 뒤를 돌아보니 푸른 들판 너머로 산방산이 보이고, 그 뒤로 한라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시야가 확 트이면서 남서쪽 바다가 펼쳐졌다. 형제섬 사이로 마라도로 가는 여객선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가파도가 형태를 드러냈다. 잔잔한 물결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작은 배 한 척이 송악산 절벽 아래로 정박했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내려주는 듯했다.
송악산의 정상 부근에 이르자, 바다와 절벽, 그리고 산의 능선이 한데 어우러졌다. 전망대에 서니 멀리 마라도가 점처럼 보이고, 그 옆으로는 가파른 절벽 아래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발아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군사 유적지와 해안 포대의 흔적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무게가 나란히 서 있는 장소였다.
송악산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이 소요되었다.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무언가를 내려놓은 사람처럼 가벼워져 있었다. 산을 오르지 않고 둘레를 걷는 일은 마치 중심을 돌며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는 의식 같았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정열이 아닌, 풍경을 끌어안으며 걷는 수평의 시간. 어느 순간부터는 걷는 나와 풍경이 구분되지 않았다. 바람이 나를 밀어주기도 하고, 억새가 나를 따라 고개를 흔들며 내 생각을 긍정해주는 듯했다.
나는 대부분 걸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해안길에 이르렀을 때, 파도 소리가 내 안의 오래된 침묵을 깨우는 듯했다. 그 소리는 말보다 진했고, 고요보다 깊었다. 바다는 거대한 거울처럼 하늘을 품고 있었고, 나는 그 끝없는 푸름 속에 나의 작은 존재를 띄워보았다. 걷는 동안 마음속 무게들은 천천히 풀려나가더니, 어느새 얇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도착했을 때 나는 산방산을 바라보았다. 걸으면서 풀어나갔던 걱정과 근심을 산방산 위로 올려놓았다. 역시 산은 언제나 관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