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금능해수욕장>
9년 전, 협재해수욕장 인근에는 만화가 메가쇼킹 님이 운영하던 ‘쫄깃센터’라는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당시 협재해수욕장은 CNN에서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50곳’ 중 하나였고, 쫄깃센터는 그 해안 뷰를 가장 가깝고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워낙 인기 있는 숙소라 예약조차 쉽지 않았는데, 아는 형님의 도움으로 하루 묵을 수 있었다. 그 시절 협재해수욕장은 인파로 북적였고, 해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협재해수욕장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투명하고 맑은 바닷물과 눈부신 백사장이었다. 모래는 곱고 부드러워 맨발로 걸어도 전혀 부담이 없었고, 얕은 수심과 완만한 깊이 변화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기기에도 최적이었다. 나처럼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에게도 편안히 다가오는 해안가였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로 인한 바가지 요금. 협재해수욕장에서 밀려나다시피 벗어나 남쪽으로 걸었다. 야자나무가 무성하게 늘어선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또 다른 해안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금능해변이었다. 그때만 해도 협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상대적으로 한적했고,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금능해변에 마음을 빼앗겼다.
제주 금능해수욕장은 한림읍 서쪽 해안의 숨은 보석 같은 장소다. 요즘은 차박 여행자들의 성지로 자리 잡아 예전처럼 고요하진 않지만,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해안으로 남아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새하얀 백사장은 마치 동남아 해변을 연상케 하고, ‘밀키블루’와 ‘코발트블루’가 층을 이루는 환상적인 물빛은 가히 독보적이다.
이곳의 자연미는 사계절 내내 아름답다. 특히 썰물 때 드러나는 넓은 모래사장은 아이들과 함께 조개나 소라를 잡으며 놀기에 제격이다. 백사장에 앉아 저 멀리 채집에 열중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녁이 되어가는데도 아이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 하늘은 서서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구름이 많았지만, 나는 끝까지 백사장을 떠나지 않았다. 낮의 푸르름을 털어낸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들었고, 그 색은 물감처럼 번져 바다 위로 스며들었다.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듯 서로를 닮아가는 그 순간, 나는 말없이 앉아 마음속의 소음을 하나씩 비워냈다. 하루의 감정들이 노을빛 속에서 조용히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붉게 물든 하늘은 따뜻하면서도 묘하게 쓸쓸했다. 그 불꽃 같은 색은 태양의 마지막 안간힘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오래된 편지를 불태우는 장면 같기도 했다. 기억 속 묻어둔 후회나 그리움이 색채를 타고 다시 피어올랐다.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인데, 마음속 무언가가 조용히 흔들렸다. 감정은 말보다 먼저 움직였고, 그 감정은 곧 깊은 침묵이 되어 나를 감싸 안았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였다.
제주의 수많은 해안 중에서도,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단연 금능해안이다. 그날의 붉은 하늘, 바다, 그리고 조용한 해변이 내게 말없이 건넸던 감정들은 지금도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