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 <태양정육식당><와싸다포장마차>
문래동에서 진행하는 전시가 있었다. 이 전시의 총괄 기획을 맡은 친구가 토요일에 하는 퍼포먼스를 꼭 보라며 추천해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윤지였다. 우리는 공연을 같이 보기로 했고, 남편 이우성도 “같이 가보자”며 합류했다. 곧 윤희–신우 커플까지 자연스럽게 덧붙었다. 약속은 금세 주말 모임의 형식을 띠기 시작했다. 전시와 퍼포먼스를 보고, 근처 고깃집에서 술을 마시기로, 문래동에서 하루를 통째로 보내는 일정이 조용히 완성되었다.
폐마트 건물을 통째로 비워낸 공간에서 열린 전시 <산 그림자 물 볕 달 내음>의 한켠, 최찬숙의 퍼포먼스 <THE TUMBLE LIVE>가 시작되었다. 사막 식물 회전초(tumbleweed)를 좇아간 이주·전쟁·토지 수탈 같은 현실의 서사가, 영상과 사운드, 드럼의 리듬으로 엮여 우리 앞에 펼쳐졌다. 처음에는 어색한 퍼포먼스 공식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폐마트의 허공을 가르는 사막 영상, 화면 가득 쓸려 다니는 회전초 군집, 드론 시야로 내려다본 대지의 이미지를 보다 보니, 마치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라이브로 듣는 듯 공연의 몰입도가 점점 높아졌다. 비어 있는 건물에 울리는 드럼과 전자 사운드는 ‘넘어짐’과 ‘흩어짐’의 리듬을 반복했고, 나는 그 소리가 내 몸 안의 오래된 피로와 함께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회전초가 먼지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엉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듯, 퍼포먼스는 실패와 붕괴의 감각이 단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형태의 관계와 리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최찬숙 감독이 모은 뮤지션들의 이력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았고, 특히 목재로 만든 드럼 앞에 앉은 서수진 드러머의 연주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회전초가 굴러가다 어느 벽에 부딪히는 순간마다, 그녀의 스틱이 드럼 표면에 남기는 흔적처럼 소리가 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약 11분 남짓의 퍼포먼스였지만, 그 시간은 내 영감의 한 지점을 깊게 파고들어 오래 머물렀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나는 거대한 회전초 더미 사이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을 고르며, 자연스럽게 서수진 드러머의 인스타그램을 찾아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공연장을 나와 우리는 신우가 고른 정육식당으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거리가 있어서인지, 걸음이 길어질수록 우성의 표정은 점점 건조해졌다. 말수가 줄어들고 대열의 맨 뒤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혹시나 대오에서 이탈해 돌아가 버릴까 봐 농담과 핀잔, 가벼운 격려를 동원해 그를 다시 우리 곁으로 끌어왔다. 신우는 “이 아파트 단지만 지나면 바로 나와요”라며 공원과 아파트를 가로질러 길을 텄고, 정말로 단지를 빠져나오자마자 <태양정육식당>이라는 적당히 낡은 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정육식당은 영등포에서 나고 자란, 유도선수 출신 대표가 2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지켜온 정육식당이었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저 동네에 흔히 있는 고깃집처럼 보였다. 그런데 홀과 룸 공간마다 좋은 술과 잔들이 다소 어수선하게, 그러나 묘하게 애정을 담아 진열 혹은 적재되어 있었다. 대표는 큰 안양 도축장에서 들여오는 최상급 투플러스 한우만을 고집하고, 두툼하게 썰어 2~3일만 적당히 숙성해 낸다 한다. 그래서인지 냉장 진열장 안에 가지런히 놓인 꽃등심, 안심, 제비추리, 안창살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이 집의 시스템은 간단하면서도 재미있다. 먼저 정육 코너에서 원하는 부위를 kg 단위로 골라 담고, 자리에 앉으면 1인당 상차림비로 숯불·석쇠·명이나물·반찬·된장찌개까지 한 번에 차려진다.
예약된 자리에 가방을 내려두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 고기를 골랐다. 콜키지 프리 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이 고기를 고르는 동안 나는 집에서 가져온 백주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고기는 평소 ‘굽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 신우가 맡았다.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오늘의 고기에 쏟아붓는 신우는, 불의 세기와 뒤집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조율하며 시간을 리드했다. “역시 고기는 남이 구워주는 고기가 맛있고, 남이 ‘정성스럽게’ 구워주는 고기는 더 맛있다”는 진리가 또 한 번 증명되었다.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 우리는 우성이를 먼저 집으로 보냈다.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누군가는 늘 제일 먼저 밤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남은 인원은 자연스럽게 2차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우아하게 1차를 먹고 마셨으니, 이제는 조금 더 털털하고 솔직해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역시나 속도를 내며 먹고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