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 <오디움>
나의 독서에는 나름의 의식이 필요하다. 조용한 도서관보다는 적당한 백색소음이 배경으로 깔린 공간이 좋고, 손끝에 형광펜이 쥐어져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단지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까닭이다. 글과 나 사이의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고, 소란스러운 공간에선 문장 하나를 몇 번이고 되씹어야 한다. 책을 멀리하는 편은 아니다. 읽는 행위는 오히려 내 루틴의 일부지만, 그 속도를 내게 하는 것은 늘 환경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자주 ‘듣는 나’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내가 청각에 유독 예민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막걸리를 빚을 때면 흥얼거릴 수 있는 노동요가 필요하다. 선곡은 주로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익숙한 리듬과 따라 부르기 좋은 댄스가요다. 이때만큼은 환경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노동이 리듬을 타고 흘러가기만 한다면, 소리는 그냥 그 흐름에 살짝 실려 오면 된다. 반면, 이동 중에는 음악을 꺼둔다. 걷는데 집중하고 싶어서다. 대신 나는 음악을 듣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낸다. 특히 밤, 세상이 낮은 숨을 고를 무렵, 혼자 있는 고요한 공간에서 음악만을 위해 귀를 열어두는 시간. 그건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나를 비워내는 의식에 가깝다.
요즘은 그런 청음을 위한 공간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조용한 테이블, 커다란 스피커. 이용료를 내고 그 앞에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귀만 활짝 열고 있는 그 시간이 주는 해방감은 생각보다 크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을 넘어, 마음속 먼지를 털어내는 시간이다. 구석구석 숨어 있던 감정의 이물질이 빠져나가는 기분. 마치 봄날 창문을 활짝 열고, 집안 가득 햇살을 들이는 일처럼.
그중에서도 ‘제대로 된’ 스피커 앞에 앉는 일은 각별하다. 싸구려 유리창이 세상의 색을 탁하게 왜곡시키듯, 조악한 음향은 음악의 숨결을 가두고 마는데, 좋은 스피커는 마치 맑고 투명한 창처럼 소리를 통과시킨다. 그 유리를 통해 우리는 연주의 온도, 보컬의 떨림, 악기 사이의 침묵까지도 들을 수 있다. 음악이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고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청음 공간 <오디움 Audeum>을 찾았다. 양재동에 문을 연 ‘소리 박물관’이다. KCC그룹의 정몽진 회장이 오랜 세월 수집한 빈티지 오디오를 기반으로, 서전문화재단이 설립한 곳이다. 오디오 기술의 역사를 따라가는 전시는 1877년 유성기부터 시작된다. 200년에 가까운 세월을 아우르며, 청음과 시청각 체험이 어우러진 공간. 그것이 오디움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무료로 운영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이곳을 ‘귀의 미술관’이라 부른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분은 전직 방송국 엔지니어였다. 전시를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오디오만큼이나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설명을 열심히 따라갔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기기가 소개될 때는 귀가 절로 쫑긋했다. 한 공간에서 백지영의 ‘무시로’가 흘러나왔다. 감정이 쏟아지는 듯한 목소리와 오디오의 해상력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그 순간, 몸에 소름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단지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통째로 맞이하는 경험이었다.
음악은 단순한 소리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위에 수놓은 정서의 결이다. 마치 정성스레 짠 천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듯, 귀로 느끼는 음악은 온몸으로 만져지는 감각이다. 교향곡의 시작과 함께 별빛처럼 흩어지는 바이올린, 흙처럼 묵직한 콘트라베이스의 진동, 그 사이의 여백에서 피어나는 정적. 그러한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귀로 듣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도 음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따금 나는, 그런 소리를 듣기 위해 삶의 속도를 늦춘다. 소리가 나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소리를 머금고 있게끔.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