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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 | 전주의 가맥을 다시 찾다

전주 <전일갑오>







전주에는 두 가지 술 문화가 있다. 한쪽에는 막걸리 한 사발마다 새로운 안주가 차려지는 푸짐한 막걸리집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가벼운 마른안주와 병맥주로 저녁을 여는 ‘가맥집’이 있다. 나는 막걸리집에는 20대부터 수없이 발걸음을 옮겼지만, 가맥집은 늘 ‘언젠가’로 미뤄두었다. 그때 내 생각에 맥주는 그저 맥주일 뿐, 특별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가맥’이라는 말은 전주의 작은 슈퍼마켓들에서 태어났다. 1980~90년대, 퇴근한 단골손님들이 하나둘 모이면 냉장고에서 막 꺼낸 병맥주가 카운터 위에 올라왔다. 옆에는 황태구이나 오징어채 같은 집 주인의 손맛이 담긴 안주가 놓였다. 호프집처럼 번듯하지도, 주점처럼 요란하지도 않았다. 진열대 사이, 간이 의자 위에서 마시는 한 잔에는 동네의 온기와 생활의 숨결이 녹아 있었다. 이 소박한 풍경은 전주의 향토적 정취와 서민의 낭만을 품으며, 이제는 나같은 타지인들까지 끌어들였다.


내가 처음으로 그 문화를 맛본 건 2016년이었다. 완주 농촌진흥청 세미나를 하루 앞두고 전주에 도착한 날, 일행과 술자리 장소 이야기를 나누다 불현듯 ‘가맥’이 떠올랐다. 우리는 곧장 그 성지라 불리는 <전일갑오>로 향했다. ‘전일’은 오래된 슈퍼의 이름, ‘갑오’는 이 집의 간판 안주 ‘갑오징어’에서 왔다 한다. 문을 열자 벽에는 ‘전일수퍼’와 ‘전일갑오’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연탄불 위에서 황태가 구워지는 냄새가 우리를 맞았다.


맥주를 주문하며 브랜드를 묻는 이모님께 우리는 건성으로 “하이트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곧 맥주가 먼저 테이블에 놓였고, 아무 생각 없이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넘긴 순간, 모두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서울에서 마시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보리향이 살아 있는 맥주였다. 라벨을 보니, 제조 공장이 바로 전주였다.

그 순간 나는 오래전 충주에서의 경험을 떠올렸다. 2014년, 국세청 주류면허센터 교육 중 운 좋게 방문했던 ‘클라우드’ 맥주 공장. 예약이 반년 넘게 꽉 찼다는 그곳에서, 최신식 설비와 깔끔한 투어를 마친 뒤 마셨던 마지막 시음 맥주. 첫 모금에 우리는 모두 눈을 마주쳤다. “이게 우리가 알던 그 맥주 맞아?” 체코 플젠에서 마셨던 필스너우르켈을 떠올리게 하는 깊은 맛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맥주는 ‘어디서’ 마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술이 된다는 것을.


며칠 전, 뉴스를 통해 <전일갑오>의 휴무 소식을 들었다. 전주에 들른 김에 그 골목을 찾아가 보니, 출입문에는 ‘6월 23일부터 임시휴업’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곳을 사랑했던 손님들의 마음에도, 연탄불처럼 작은 불씨가 꺼져가는 듯한 허전함이 번졌다. 전일갑오는 영동슈퍼, 초원편의점과 함께 전주 가맥 문화의 지도를 오래 지켜온 좌표였다.


후속 보도에서 사장님은 가을에 돌아올 뜻을 내비쳤다. 그날이 오면 나는 다시 전주행 기차를 탈 것이다. 연탄불에 올려진 황태가 반쯤 익어가는 동안 보리향 그득한 전주 맥주 한 잔을 들고, 다시 한번 저녁빛이 물드는 골목에 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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