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아일랜드 생활은 이상하게도 ‘개방된 군생활’ 같았다. 누구도 나를 통제하지 않았는데, 매일이 비슷한 동선과 비슷한 얼굴들로 반복되었다. 더블린에 정착하거나 공부하러 온 한국인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지금처럼 촘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정보가 되었고, 소문은 길보다 빨랐다.
시내에 나가면 늘 보던 한국인과 인사하고,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누구 집에서 파티가 열리면 그건 한인 사회의 ‘큰 이슈’였다. 여행으로 잠시 아일랜드를 벗어나는 기간을 빼면, 나는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패턴을 되풀이했다.
그때 나는 같은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았던 세 명과 자연스레 한 무리로 엮였다. 처음 친해진 경유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술자리에서 자주 만났다. 그중 두 명과는 8박 9일 동안 아일랜드 중부를 관통하는 위클로우 웨이를 걸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 올레길 같은 길이었다. GPS도, 지도 어플도 없이 지도 한 장으로 걸었던 길인만큼 시행착오도 많았고, 덩달아 추억도 무궁무진했다. 9일 동안의 동거동락은 관계를 단단하게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이었다. 같은 향의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배고파지고, 같은 폭우에 젖은 것. 이 여행 이후, 우리는 많이 만나서 놀고 마셨고, 지금 폭로하면 아주 미세한 개인적 이미지 손상을 가져올 에피소드도 쌓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인연은 종종 이어졌다.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축제인 세인트 패트릭 데이, 그 해의 리미티드 에디션 ‘Jameson’ 위스키를 사 들고 우리는 남기를 만나러 울산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또 한때 직장인들 사이에서 주말 회식 장소로 유명했던 ‘밤과 음악사이’에도 애들 덕분에 들어가 새벽까지 즐길 수 있었다. 나와 띠동갑 차이 나는 친구들을 앞세워 무사통과했었다.
14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더블리너와의 인연은 희미해졌지만, 이상하게도 이들과의 끈은 가장 질겼다. 2025년 여름, 남기가 출장으로 서울에 왔을 때, 우리는 번개처럼 모였다. 그 자리에서 다애가 느닷없이 결혼 소식을 꺼냈다. 2012년부터 만난 남자친구와 이미 동거 중이었으니 결혼은 언젠가의 미래가 아니라 이미 놓인 레일 같았는데, “결심했어”라는 한 문장은 새로웠다. 결심은 늘 일상에서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한다.
결혼 1년 차 남기와, 결혼을 앞둔 다애는 준비해야 할 것들로 불판만큼이나 뜨겁게 대화했다. 드레스 착장을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는 다애 앞에서 나는 “넌 장원영 같은데 무슨 다이어트를 해?”라는 희대의 망언을 내뱉었고, 그 이후 나는 다애에게 ‘장원영’ 공격을 수시로 감행했다.
결혼식 날짜가 가까워지자, 과분한 미션 하나가 카톡방을 달궜다. 다애는 우리에게 축가를 부탁했다. ENFP 성향의 다른 친구들은 ‘그럼 뭘 부를까’ ‘의상은?’ ‘동선은?’ 하며 신이 났는데, 문제는 나였다. 나는 딱 잘라 안 한다고 했다. 여행 중 장기자랑 정도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겠지만, 남의 일륜지대사에 오점을 남기는 것 같아 쉽사리 나설 수가 없었다. 애들이 처음에는 성시경의 ‘이윽고’만 따라 부르고 무대에 서 있기만 하라고 달래더니, 이 인간들은 결국 어떻게든 나를 끌어들이려 했다.
결혼식 당일, 그들은 아일랜드 요정 레프리콘 가면을 쓰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 뒤에서 그 모습을 담았다. 신랑 재성이까지 당황하게 만드는 퍼포먼스였다. 어쩌면 그 당황은, 축복이 가진 가장 인간적인 표정이었을지 모른다. 완벽하게 정돈된 식장보다, 예상 밖의 웃음이 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