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주점 판자집><서른 즈음에>
나는 노포를 종종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비유한다. 그 문턱을 넘는 순간, 나는 배를 채우러 온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관람하러 온 사람처럼 숨을 낮춘다. 손끝에 먼저 닿는 건 미닫이 문의 눅진한 결, 오래된 손들이 밀고 당기며 남긴 윤기다. 한 발 더 들이면 세월이 쌓아 올려 뒤섞인 냄새가 따뜻한 먼지처럼 폐 깊숙이 가라앉는다. 자리부터 맡아두고 천천히 내부를 훑는다. 차림표는 메뉴가 아니라 시간이 눌러쓴 연대기. 군데군데 바랜 잉크, 접착력이 풀려 올라온 모서리, 손때가 만든 미세한 얼룩이 ‘무엇을 먹을까’보다 ‘무엇을 지켜왔을까’를 먼저 묻는다.
이런 마음으로 신촌의 골목을 걷는다. 대학가의 밤은 늘 젊지만, 그 젊음이 늘 새것만은 아니다. 어떤 가게들은 신입생의 설렘과 졸업생의 체념, 첫사랑의 탄산과 이별의 쓴맛을 한꺼번에 품고, 그저 버틴 시간을 붙들어 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공간은 장식이 아니라 생존의 기록이 된다.
첫 번째 전시는 <주점 판자집>이다. 실내는 밝고 또렷한 조명으로 면을 드러내기보다, 희미한 전구빛이 테이블 위로 뭉쳐 떨어지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공기가 눅진하게 그늘진다. 그 은근한 어둠이 사람들의 말소리와 술 냄새를 한데 감싸 ‘오래된 밤의 밀도’를 만든다. 탁자와 의자는 투박한 골격처럼 자리를 지키고, 학창시절에 쓰던 걸상까지 섞여 있다. 표면엔 닦여 반들거리는 곳과 미처 지워지지 않은 자국이 층을 이뤄 손바닥에 먼저 질감을 건넨다. 무엇보다 벽이 압도적이다. 신문지로 도배된 벽면 위에 누군가 남기고 간 문장과 낙서, 포스터와 종이의 흔적이 빈틈을 메우듯 빼곡해 벽이 ‘배경’이 아니라 ‘기록물’처럼 보인다. 겹쳐 붙었다가 떼어진 종이의 테두리는 얼룩처럼 남아 있고, 그 얼룩들은 이 집이 지나온 계절의 자막 같았다. 함께 온 고려대학교 졸업생 동생은 “여기, 고대 앞 풍경 같다”고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나의 ‘필요’를 채워준 곳이 <주점 판자집>이었다면, 동생 신우가 찾아낸 다음 장소는 ‘낭만’을 꺼내 드는 방식이 달랐다. 신촌 골목 어귀 2층, 환한 흰빛에 비춰 보이는 <서른즈음에>라는 네 글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용히 낮아진 조명 아래로 오래된 나무 테이블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벽엔 거쳐 간 사람들이 남긴 어록 같은 쪽지들이 바람결처럼 붙어 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누군가 신청한 노래가 공기를 스치면 마음은 금세 90년대의 결로 젖어 든다.
그리고 김광석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신촌을 한 장의 사진처럼 떠오르게 만든다. ‘서른’이라는 말이 아직 낯설고 멀기만 했던 시절, 우리는 괜히 어른인 척하면서도 사실은 한없이 서툴렀다. 그런데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린 신우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세대의 틈을 건너 뛰어 다 같이 같은 후렴에 닿는 순간, 명곡은 ‘기억’이 아니라 ‘공통의 현재’가 된다는 걸 깨닫는다. 그 시절을 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시절은 노래를 통해 도착하기 때문이다.
술과 안주는 이 시간을 보내는 조연일 뿐이다. 우리는 턴테이블 앞에 서서 흰 종이에 노래 제목을 적는다. 곡명들이 러시안 룰렛처럼 머릿속에서 빙빙 돈다. 내 선곡이 좌중을 잠깐 멈춰 세울 때의 희열—그 짜릿함은, 사람의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에만 생긴다. 이승환 노래가 흐르면 라디오의 공기가 코끝에 닿고, 유재하의 멜로디가 지나가면 한 번도 완성되지 못한 어떤 밤이 다시 시작된다. 김현식의 거친 숨결, 김동률의 문장 같은 선율이 귓바퀴를 따라 번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Nirvana, Metallica, Mr. Big 같은 이름들이 불쑥 끼어들었다.
술이 조금 오르면 대화는 자연스럽게 옛날로 흐른다. 누구는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고, 누구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골목을 말한다. 말이 많아지는 대신, 문장 사이의 공백이 늘어난다. 그 공백이 좋다. 우리는 그 공백에 지나간 얼굴들을 앉히고, 떠난 세월들을 눕힌다. 그날의 우리는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믿음이 많았고, 그래서 더 자주 아팠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 신촌의 밤공기가 뺨을 스친다.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뒤돌아보면, 가게 안 어딘가에서 아직도 ‘그 시절’이 다음 곡을 준비하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신촌의 밤은 그렇게, 오늘도 조용히 전시를 이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