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동 <다모아호프><술식당소규모>
광화문에서 마포로 돌아가려던 저녁이었다. 하늘은 아직 낮의 빛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는데도, 마음은 먼저 어두워지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시간엔 늘 술이 먼저 생각난다. 하루의 끝자락이 건조해지는 기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광화문에서 일하는 준철이가 떠올라 연락을 했더니, 그는 팀장에게 엮여 회식 자리로 이동 중이라고 했다. 아쉽지 않았다. 내가 불현 듯 던진 연락이었으니, 응답의 부조화도 내 몫이었다. 나는 대체로 순간의 ‘희열’만을 담보로 삼아 사람을 부른다. 그 짧은 반짝임을 믿고 던졌다면, 실패는 실패대로 담담히 거두면 된다. 하지만 술꾼들은 안다. 첫 연락에서 미끄러졌다고 물러서는 법이 없다는 걸.
정말 내 마음을 알았는지, 그 친구가 속한 단톡방에서 다른 동생이 나에게 저녁을 권했다. 마치 사소한 구원처럼, 대화 하나가 저녁의 방향을 틀어 세웠다. 느닷없는 ‘희열’에 나는 바로 응했다. 경복궁 근처에 사는 신우와 마포에 사는 나, 우리의 중간 지점에서 보기로 했다.
아현역 근처에는 아직 살아남은 노포들이 건재하다. 재개발이라는 말이 동네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오래된 간판들은 추억 속으로 접히듯 사라진다. 사라지는 건 가게만이 아니다.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추억들도 휘발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아 있는 노포는 ‘영업 중’이 아니라 ‘기억 중’이다. 우리는 그 기억 중인 가게들 가운데,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곳으로 향했다. 아현역에서 가구단지로 가는 이면도로, 신우가 꺼낸 의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한 곳에 오래 머무는 밤이 아니라, 여러 곳을 전전하는 밤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떠돌아다니는 밤에는, 나 자신도 잠시 낯선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생활러닝을 한다는 연유로 애오개역에서 약 700미터를 한 걸음에 뛰어왔다. 뛰고 나면 몸은 가벼워지는데 목은 유난히 무거워진다. 갈증은 늘 생존을 가장한 욕망이다. 그때 골목 끝에서 <다모아 호프> 간판이 먼저 나를 불렀다. 조금 바랜 글씨와 유리창에 붙은 메뉴 스티커가 오래된 필름처럼 반짝였고, 문을 미는 순간 낮은 형광등 불빛과 오래 써서 윤이 난 구식 테이블이 조용히 맞아 주었다. 벽에는 강산이 몇 번은 변했을 법한 영화 포스터와 손때 묻은 장식들이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었다. 무엇보다 주인 아주머니의 인상이 좋았다. 무심한 듯 담백하게, 그러나 손님을 쳐다보는 눈에 쓸데없는 경계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숨을 한 번 고르고, 막 따라낸 생맥주를 두 손으로 잡아 첫 모금을 넘겼다. 차가운 거품이 혀끝에서 사르르 풀리며 달아오른 목을 단번에 식혀 주었다. 이어 나온 양배추 샐러드는 옛날 스타일 그대로였다. 투박하게 썰린 양배추 위로 캐첩과 마요네즈가 선명한 두 줄을 그어 놓았다. ‘멋’이 아니라 ‘습관’으로 만든 맛은 이상하게 믿음직하다. 그리고 바로 튀겨 나온 숯불바비큐는 바삭한 껍질로 우리를 농락했다. 손끝에 묻는 기름, 씹을 때 터지는 소리, 입안에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뜨거움까지. 그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행복해져서, 나는 잠시 ‘오늘이 잘 풀리겠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얻었다.
우리는 다음 장면을 찾아 이대역 쪽으로 걸었다. 주로 신우가 의견을 냈고, 내가 동의했다. 이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신우도 대충 안다. 그래서 내가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대 앞 골목을 저녁의 잔열이 천천히 식혀 가는 시간, <술식당 소규모> 앞에서 멈췄다. 일단 파사드 감상을 잠깐 하고 들어갔다. 조용히 번지는 향신료의 따뜻한 냄새, 냉장고 문이 열릴 때마다 울리는 유리병 소리, 구석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두 명의 여대생, 다소 조용한 분위기가 방 안을 채웠다. 조명은 과하게 밝지 않아 접시 위의 색만 선명하게 떠올랐고, 메뉴판을 보며 정적이 흘렀다. 범상치가 않은 텍스트였다.
스프카레는 묽지도 되지도 않은 농도로 숟가락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며, 표면에 작은 기름 점들을 반짝이게 했다. 첫 숟갈을 뜨는 순간, 부드러운 매운 향이 코끝을 타고 올라왔다. 사천식 닭무침은 더 노골적이었다. 결대로 찢긴 닭은 촉촉한 채 양념을 머금고, 고추기름의 붉은 광택과 알싸한 기운이 한 번에 밀려오다가도 끝맛에서 깔끔하게 정리됐다. 우리 둘은 그 사이사이를 한라산 소주로 채웠다. 이 조합에 나는 순순히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