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후라노 <Farm tomita>
겨울의 홋카이도는 소리를 삼키는 땅이다. 발밑에서 눈이 뽀드득 울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가 폐 속으로 차갑게 접힌다. 그런 계절에 나는 사람들이 여름을 찾아 몰려든다는 그곳, <Farm tomita>로 향했다. 라벤더를 보러 온다는 이름난 장소가 한겨울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엔 대개 비밀이 남아 있으니까.
입구에 다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꽃이 아니라 여백이었다. 눈이 쌓인 밭은 하얀 종이처럼 펼쳐져 있었고, 바람은 그 위에 아무 말도 쓰지 않은 채 지나갔다. 여름이라면 색과 사람으로 꽉 찼을 길이 한산해, 나는 걸음을 천천히 늦췄다. 관광지에서 천천히 걷는다는 게 얼마나 사치인지, 겨울은 그 사치를 공짜로 내어준다.
추위를 견디지 못해 대기실 혹은 사무실이라 불리는 따뜻한 공간으로로 몸을 밀어 넣자, 유리창에 맺힌 김처럼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난방기 앞에서 손을 비비며 눈길을 돌리다 라벤더 아이스크림 판매대를 발견했다. 한겨울에 라벤더라니. 계절을 거스르는 작은 농담 같기도 했다. 큰 기대 없이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차가움 뒤에 은은한 향이 따라왔다. 생각보다 달지도 않고 향이 살짝 존재감만 드러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고, 그 반응은 내 뒤쪽의 여행객들에게도 전염되어 조용히 줄이 늘어났다. 겨울의 인기란 이런 방식으로 번진다. 함성 대신 미세한 호흡과 시선으로.
2층 전시장 한쪽에 놓인 증류기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양조장 한가운데서 발효탱크를 처음 만났던 때처럼 마음이 먼저 반응했다. 꽃밭의 풍경을 지나 결국 이 장치 앞에 서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향도 술도, 결국은 ‘원물의 시간을’ 열과 증기, 그리고 기다림으로 다른 형태로 옮겨 담는 일이니까. 라벤더를 가득 채운 솥에 뚜껑을 닫고 증기를 밀어 넣으면, 꽃이 품고 있던 향이 김을 타고 올라온다. 그 뜨거운 숨이 관을 지나 차갑게 식는 동안, 눈에는 보이지 않던 성분이 물방울이 되어 맺히고, 마침내 호박빛 오일과 맑은 증류수가 층을 이루며 갈라진다고 한다. 꽃은 시들어도 향은 여기서 다시 태어나고, 그 과정은 과장 없이 담백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금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니 썰매를 탈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경사진 곳에 몸을 맡기자, 세상은 잠깐 단순해졌다. 앞으로는 미끄러짐, 옆에는 흩날리는 눈가루, 뒤로는 금세 멀어지는 발자국. 어른이 되어도 내려오는 순간만큼은 어김없이 아이가 되었다. 멈춰 선 자리에서 돌아보니, 내가 내려온 길이 얇은 선으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하루가 이렇게 겨울에 기록되었다.
야외로 나와 반대편으로 걸어가면 작은 미술관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여름의 <Farm tomita>가 액자에 담겨 있었다. 눈이 덮기 전의 오색찬란함, 햇빛의 결까지도. 나는 사진을 바라보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 내 앞의 풍경이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건 내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겨울은 아무것도 없애지 않고, 단지 모든 것을 잠시 접어 두었을 뿐이다. 꽃들은 땅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색은 기억 속에서 더 선명해진다.
미술관을 나서면 작은 온실이 이어졌다. 겨울에도 관찰할 수 있게 남겨둔 작물들이 유리 너머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밖의 하얀 세계와 안의 초록빛이 한 장의 창으로 맞닿아, 마치 계절이 서로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추위는 생명을 얼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속도를 늦추고, 소리를 줄이고, 기다림을 가르쳤다.
돌아나오는 길, 나는 다시 눈밭을 걸었다. 여름의 화려함이 없는 대신 겨울에는 낭만이 분명히 있었다. 사람의 밀도가 낮아진 자리에 풍경의 목소리가 커지고, 사진보다 느린 시선이 허락되었다. 무엇보다도, 라벤더는 피지 않아도 라벤더였다. 아이스크림의 은은한 향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한겨울에 한번 와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