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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문병과 조선총련 관련 행사에 불려 다니던 중 갑작스러운 송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버지가 위독한데 임종은 지키고 가야지.”
할머니의 절규에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얼굴에 초조함과 낭패감이 스쳤다. 날이 밝으면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뵙고 떠나야 했다. 그 밤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모시, 모시”
전화를 받는 아버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국에서 장례를 치르고 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할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모은 재산과 아들까지도 조국에 바칠 만큼 나라 사랑을 실천한 조선총련 핵심 간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례식은 요양병원에서 치러졌다. 내가 탈북 계획을 안 것은 할아버지 입관식에서였다. 지도원 동무의 감시는 입관식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는데 조촐하게 가족들 배웅만 받고 싶다던 할아버지 생전 유언 덕에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멀리 타국에 징용되어 끌려왔던 터라 일가친척 하나 없던 할아버지였다. 우리 가족만 오롯이 남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비장한 표정으로 내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곤 무릎을 살짝 굽혀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하루 너. 아바지가 손 말 익히라 했던 것 기억하디?”
나는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으라. 우린 널 탈북시킬 생각이야.”
원산항에서 오열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러면, 엄마도 다시 못 보고 두 분이 위험하지 않갔음메?”
“살아있으면 어케든 만나게 될 기야.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다 계획이 있어.”
엄마, 아버지, 친구들과 떨어져 낯선 곳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당장은 눈앞이 캄캄했지만, 그 순간이 마치 운명처럼 여겨졌다. 망설이던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탈북시키기 위해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가 곡기를 끊으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요양원 측과 간병인까지 미리 손 써 둘 정도로 굳은 결심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주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산책길의 대화가 떠오르며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제가 어카면 되갔습네까?”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주며 끝으로 한 번 더 당부했다.
“입 열면 북한말이 튀어나올 테니까 지금부터는 꼭 벙어리 행세하라우.”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렁그렁 고이는 눈물 너머로 아버지 모습이 일렁였다.
다음날 할아버지 발인을 앞두고 나는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CCTV가 있는 곳을 어슬렁거리며 바닷가를 걸었다. 병문안 올 때마다 아버지와 자주 산책했었기 때문에 주변 지형에 빠삭했다. 나는 너울성 파도가 자주 인다는 기슭을 지나 현지인들만 아는 샛길을 통해서 몰래 병원으로 돌아왔다. 병원 뒷문에는 할아버지와 잘 알고 지낸 병원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 후 나는 관 속에서 숨죽인 채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많은 탓에 요양병원에는 수시로 관이 들어가고 나갔다. 작은 트럭에 실린 초라한 목관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을 거다.
나는 할아버지가 미리 마련해 두었던 은신처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던 중 TV 뉴스를 보게 되었는데 유럽에서 터진 이슬람 테러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십 대 소년들이 가담한 자살폭탄 테러였다. “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는 동영상 속 소년의 얼굴 위에 “위대하신 수령님!”을 외치는 우리의 얼굴이 겹쳐졌다.
뒤이어 나의 실종 소식이 나오길래 하던 것을 멈추고 TV 앞으로 다가섰다. 너울성 파도에 휩쓸려 행방불명된 북한 여학생. 사십 년 만에 고향을 찾은 아버지를 따라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내 사연은 교민사회를 안타깝게 했다. 짐도 여권도 그대로 둔 채 입던 옷 그대로 버젓이 CCTV에 흔적까지 남기며 사라졌기 때문에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가 바다에서 내 목도리와 신발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으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