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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조은 Oct 28. 2022

ZERO-2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며칠 후 명함에 박힌 주소로 찾아가 봤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한참을 머뭇대다가 계단에 발을 디뎠다. 점점 짙어지는 물감 냄새가 꼭대기까지 내 발걸음을 잡아끌었다. 빈티지 스타일로 칠한 녹색 문을 밀자 비트가 강한 힙합이 제법 큰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 왔네!”


이젤 앞에 있던 여자가 덤덤한 미소로 환영했다. 밤에 언뜻 볼 때는 그저 선 머슴같이만 느껴졌는데  쌍꺼풀 없이 크고 시원하게 빠진 눈매가 시니컬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물감으로 얼룩진 낡은 작업복 역시 썩 잘 어울렸다. 어색하게 꾸벅 인사하고 나서 천천히 둘러봤다.  제일 먼저 시선을 끈 것은 낙서로 가득 찬 한쪽 벽면이었다. 투박하고 거친 선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쳐 놓은 것 같았다. 해골바가지, 왕관 같은 형태가 단순한 색채로 채워져 있고 뜻을 알 수 없는 영문 글씨와 기호가 아무렇게나 휘갈겨져 있었다.


“그쪽이 한 거예요?”

“유진이야 내 이름. 그건 바스키아라는 천재 화가 그림이고.”

그림? 황당했다. 게다가 천재라니…….

“낙서 같지?”


속을 들킨 것 같아 뻘쭘했다. 찬찬히 다시 그림을 살펴봤다. 거칠고 난해한 형태 위에 영문 글씨와 숫자들이 병적일 만큼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갈겨 놓은 것 같으면서도 묘한 조형미가 느껴졌다. 과감하고 거침없는 붓 터치와 독특한 배색 때문이었다.    


“이 사람, 왜 이런 그림을 그려요?”

“그러는 넌 왜 낙서하지?”


나는 잠들기 위해서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밤 골목을 배회하다 스프레이 통을 발견하기 전까지 지독한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파트 단지에서 한강 둔치로 연결된 지하 통로를 걷는데 양쪽 벽에 방금 끝낸 듯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버리고 간 빈 스프레이 통엔 제법 많은 양의 물감이 남아있었다. 벽화를 향해 분사해 봤다. 치 이익! 묘한 쾌감이 온몸에 번졌다.

 

 “그리고 또 궁금한 게 있는데?”

 

 여자의 질문에 과거의 기억에서 돌아왔다.


 “뭔데요?”

 “‘넌 그림에 하나같이 숫자와 문자를 썼던데……. 왜지?”

 “아, 그거……. 이상 시 베껴 쓴 건데요.”

 “이상? 시인 이상 말이니?”

 “내 눈엔 마치 그림처럼 보였거든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답했다. 유진이 허! 하며 감탄사를 내뱉듯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내 짐작이 맞았네.”

 “뭐가요?”


유진이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포개어 놓은 캔버스 중 하나를 꺼내어 앞면이 보이도록 돌려세웠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 자세히 보면 거꾸로 배열된 숫자의 조합이었다. 배경이 되는 푸른빛과 묘하게 겹쳐진 붉은빛이 혼합되어 전체적으로 보랏빛을 띠고 있는 것은 이상의 오감도 시 제4호였다. 


 “역시 알아보는구나.”

 

내 표정을 본 유진은 캔버스 몇 개를 더 꺼내어 보여주었다. 하나같이 색채와 무늬로 패턴화 된 이상의 시였다. 이상의 시에 나만큼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거다. 캔버스에 배열된 형태는 혼합된 색채와 함께 독특한 이미지를 발산했다.

 

 “그건……. 그림인가요?”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건 그림이야. 이상의 시를 소재로 했을 뿐 엄연히 재창조된 내 작품 맞아. 처음 네 낙서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


 “왜요?”

 

유진은 뒤쪽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가리켰다.


 “저 거울에 비친 그림을 봐.”


조금 전까지 내 눈을 붙잡았던 문자들은 읽을 수가 없어 거슬렸다. 반면 비정상으로 보였던 거꾸로 된 숫자들은 도리어 역전되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난해한 기호처럼 보이다가 뭔가 분명하게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은 숫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네가 알고 써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오감도 시 제4호는 숨겨진 자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작품이거든.”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어 유진을 쳐다보자 겸연쩍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물론 평론가 해석이야. 꼭 그것이 아니어도 거울에 비춰보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볍게 무너트리려는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지. 난 이상 시를 처음 봤을 때 숫자와 글자에 내포된 의미보다는 일정하게 반복되는 형태와 이미지가 추상회화 같다고 느꼈거든. 네 그림을 본 순간 나 말고 또 누군가 이상의 시에서 그런 미학적 조형 요소를 발견했다는 것이 반가웠어.” 

 

 예상치 못한 거창한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우연히 보고 필 꽂혔을 뿐이데요.”

 “그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테지?”


유진의 질문에 처음 시집을 펼쳤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 봤다.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이상한 가역 반응’ 등 호기심을 자아내는 제목뿐 아니라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는 독특한 시 구절 등에 강한 매력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그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자니. 귀찮았다. 그래서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냥 좀 끌렸어요.”


 내 대답에 유진은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고 말했다. 

 

“하긴……. 비록 난해하긴 해도 그의 작품을 접하면 일단 그 독특함에 매료될 수밖에 없지.”


유진은 곧장 구석에 있는 탁자로 가더니 드로잉 북을 펼쳤다. 옆에다 길게 깎은 4B연필 다섯 개, 톰보 지우개 하나도 꺼내 놨다.


 “왔으니 아무거나 한번 그려 봐. 심이 닳으면 옆에 있는 다른 연필 쓰고.”


당황스러웠다. 유진은 내 시선 따윈 가볍게 무시한 채 있던 자리로 돌아가 그리던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과제가 난감했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서 우두커니 유진을 바라보았다. 이젤에 붙은 사진을 보며 부지런히 손 놀리는 솜씨가 부드럽고 날렵했다. 적당히 강약 실린 움직임은 마치 배경음악에 박자 맞추어 지휘하는 것처럼 리드미컬했다. 그림은 사진과 전혀 다른 형태와 색채로 표현되고 있었다. 정말 저렇게 보이는 걸까? 왠지 낚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키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뭘 그려야 할지 막막해 천천히 둘러봤다. 잡동사니 중에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손가는 데로 연필을 움직였다. 선이 비뚤어져도 지우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그려나갔다. 드로잉 북을 다 채웠을 때는 창문으로 석양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유진이 다가와 내 그림들을 살펴보자 민망해졌다. 드로잉 북을 넘기던 유진이 피식 웃었다. 

  

 “왜요?”


 유진은 손가락으로 내 그림들을 가리켰다. 


 “봐, 넌 꽃병을 그리면서도 겉에 있는 불규칙한 무늬만 집요하게 그렸잖아, 게다가 사물도 하나같이 걸레나 구겨진 종이, 시들어 말라비틀어진 꽃. 어째 이런 것들만 눈에 들어올까 싶어서.”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줬다. 

 

 “한 가지 놓친 게 있네.”


 유진이 내 그림에 쓱쓱 명암을 넣기 시작했다. 그림은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생동감 있게 변해 갔다. 

 

 “그늘진 곳과 그림자도 비중 있게 다루어 주어야 해.” 

 

 빠른 손놀림과 함께 유진은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그림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렇지 않을까? 그늘진 곳이 없는 삶이란 편할지는 몰라도 뭔가 입체감이 없게 느껴져. 감동이 없어.” 


 곧이어 다 손봤는지 드로잉 북을 내게 내밀었다. 불과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을 뿐인데 그림에 생기가 돌았다. 깜짝 놀랄 만한 효과였다.

 

 “오는 토요일에 우리 ‘ZERO’ 팀 한판 뜰 건데. 같이 갈래?”

 

 팀? 유진의 닉네임이 아니었나 보다. 토요일이면 수학 과외가 있는 날이다. 끝나고 적당히 핑계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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