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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조은 Oct 28. 2022

ZERO-1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빛과 색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물감으로 얼룩진 벽에 ‘이상’의 시구를 써넣었다.

  

999999999ㆍ0
0000000000ㆍ

진단 0,1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그의 시에 꽂힌 것은 일 년 전쯤이다. 표지 그림에 끌려 서점 가판대 시집을 우연히 들춰보았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은 시 오감도 첫 구절이었다.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손전등을 끄고 검정 후드 티와 마스크, 장갑을 벗어 재빨리 배낭 속에 구겨 넣었다. 골목을 벗어날 즈음 잘빠진 흰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값이 꽤 나갈만한 고급 차였다.

 

배낭을 내려놓고 붉은색 스프레이를 꺼냈다. 한번 흔들어 준 다음 자동차를 겨냥해 분사했다. 앞 범퍼에서 시작된 곡선이 리듬을 타듯 자동차 옆 라인으로 뻗어 갔다. 거의 다 돌았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스프레이가 땅에 떨어져 요란하게 굴렀다. 


 “너였니?”


상대방은 군용 점퍼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차림새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배낭을 보더니 그쪽으로 끌고 갔다. 내용물을 살피느라 손아귀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뿌리치려 하자 손목이 다시 꽉 조였다. 상대가 돌아보면서 내 몸을 눈으로 훑었다. 

 

“뭐냐? 이 범생이 스타일은. 의외네.”

 

나 역시 의외였다. 여자였다. 힘 좀 더 써 볼 걸……. 순순히 끌려 온 게 후회됐다. 후다닥 튀어 보려 다시 시도했건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가 발을 걸었기 때문이다. 결국,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여자는 마치 형사가 범인을 체포하듯 내 팔을 뒤로 꺾어 일으켜 세우며 등짝을 툭툭 쳤다.


 “그동안 여기 그림 다 손대고 다닌 게 너지?”

 “손대긴 무슨……. 뭐 별거라고.”

 

전의를 상실한 나는 용쓰는 대신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발끈해서 미간을 찌푸리던 여자가 돌연 눈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소리쳤다.

 

 “야! 너희 거기 뭐야. 남의 차 앞에서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여자가 내 손을 잡은 채 반대쪽으로 뛰었다. 뒤에서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여자는 골목길에 뛰어들어 좁은 건물 사이로 내 몸을 바짝 밀어붙였다. 그러곤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여자의 숨결이 귓불에 닿았다. 뒤쫓아 온 남자가 골목 어귀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 사라졌다. 고비를 넘기자 여자가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난처하게 됐어. 아마 당분간 경찰들이 쫙 깔릴 거야.”

 “어차피 그쪽도 허가받고 그리는 건 아니잖아요.”


여자가 대꾸하는 대신 아랫입술을 내밀며 ‘후’ 하고 위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앞머리가 살짝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열받은 표정이었다. 

 

“우린 너처럼 막무가내로 휘갈기는 게 아니야. 같은 불법행위라도 노골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지. 이대로 널 경찰에 넘길 수도 있어.”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가 여자가 피식 웃는 바람에 오기가 생겼다.

 

 “뭐, 그러시든가.” 

 “언제까지고 네가 내 구역을 휘젓고 다니게 할 수는 없단 말이지.”

 “알았어요. 다른 데로 가면 되는 거죠?”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렸다. 벌써 밤이 깊었다. 들키지 않고 들어가기엔 이미 너무 늦었는지 모른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여자의 말에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발소리와 함께 다가온 여자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그리고 다니는 거. 일종의 그라피티야. 네가 한 건 낙서지만 우리가 하는 건 그냥 낙서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내 호주머니에 뭔가를 찔러 넣었다. 


 “관심 있으면 한 번 들러.”

 나를 지나쳐간 여자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흔들어 주고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ZERO?'

 

 이름 대신 닉네임이 박힌 명함이었다. 그 밑에 그라피티 아티스트라는 낯선 단어가 인쇄되어있었다.


 며칠 후 현관을 나서다가 엄마와 마주쳤다. 고무장갑과 비눗물이 든 물통을 들고 있었다.

 

 “나가게? 그냥 집에서 하지?”         

 “독서실이 편해.”

 “어느 놈인지 잡히기만 해 봐, 요즘 세상에 남의 집 담벼락에 낙서하다니…….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짜증 섞인 엄마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 지나쳤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불러 세웠다. 


 “정말 독서실 가는 거지? 혹시라도…….” 


 탐색하듯 쳐다보는 눈초리가 느껴졌다. 뒤통수가 따끔했다.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싶어 얼른 먼저 쏘아붙였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 봐.” 


 혀를 끌끌 차던 독서실 총무가 떠올랐다. 

 “네 엄마 진짜 극성이더라.”

 

엄마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불안만 신뢰할 뿐이다.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언제부턴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온 신경을 다 쓰면서도 엄마는 정작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미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미술뿐이 아니었다. 음악과 체육마저 한 학기를 제외하고는 시간표로만 존재하는 유령 과목이 되었다. 학습 부담을 덜어준다던 정부 정책이 가장 부담스러운 과목만 남겨놓은 셈이다. 공부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신앙처럼 믿는 엄마에게 그림 그리겠다는 말은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감수할 만큼 내 재능에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끄적이는 정도로 만족했는데 그마저도 막히고 보니 막막하고 화가 났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다. 지독한 편두통이 시작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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