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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조은 Oct 28. 2022


ZERO-3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토요일 자정 무렵이 다 되어 모인 곳은 변두리 재개발 구역이었다. 건설사 가림막에다가 작업할 거라고 했다. 유진 외에 남자 셋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나보다 어려 보였다.

 

 “못 보던 앤 데 누구야? 비주얼이 우리랑 안 맞잖아?”


 하필 나보다 어려 보이는 놈이 이죽거렸다. 

 

 “아는 동생이야. 이름이…….”

 

 유진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영이라고 해.” 


 나는 성을 생략한 채 마지못해 이름만 댔다.

  

“영? 우리 팀 이름이네. 좋아, 봐줬다.”


 뭘 봐준다는 건지. 녀석은 헤벌쭉 웃어 보였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나머지 두 명은 고개만 꾸벅였다. 


“순찰 돌기 전에 끝내야 해. 한 시간이다! 레츠 고!”


모두 유진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유진이 컬러 스프레이 몇 개를 나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받으려다 보니 하나를 놓쳐 버렸다. 떼구루루 굴러가는 것을 재빨리 발을 뻗어 멈춰 세운 후 줍는 동안 나머지는 각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리듬에 맞추어 춤추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번갈아 스프레이를 뿌릴 때마다 가림막 속에 숨어 있던 것들이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아이돌 댄스처럼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형태 그리기와 채색 마무리가 착착 이루어졌다. 유진은 따로 떨어져 혼자 그렸는데 손놀림이 귀신같이 빨랐다. 빈 스프레이 통이 순식간에 바닥에 쌓였다. 모두 내가 뭘 하든 개의치 않았다. 그 무관심이 도리어 편했다.


“마무리, 10분 전!”


유진의 외침에 나를 포함한 모두의 손놀림이 부산해졌다. 달칵! 스프레이 통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작업이 끝났다. 아까 이죽거리던 남자애가 내 그림을 보더니 휙 휘파람을 불었다.

 

 “형 얘 좀 봐!”

 

유진을 비롯해 나머지 두 명도 내 그림을 보고 동시에 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렇게나 휘갈기는 것이면 모를까 짧은 시간에 형태 잡고 색칠까지 하는 것은 나에겐 무리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단순하고 강한 이미지였는데 반응을 보니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그린 것은 정면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 주먹이었다. 

 

 “우리보다 낫다, 야! 특별한 기교 없이 세상을 향해 뻑큐를 날렸잖아?”

 

 유진의 말에 크게 웃던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뭐야, 너도 뱅크시 추종자냐?”

 “뱅크시? 그게 뭔데요?”

 

 내 말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뱅크시를 몰라?”

 “알아야 해요?”

 

내가 반문하자 아까 이죽거리던 놈이 불쑥 끼어들었다. 

 

“있어. 이 바닥 전설. 아니, 우상이라고 해야겠지. 그보다 너. 맘에 든다. 이참에 팀에 정식으로 들어와라.”


머릿속이 개운해지면서 오랫동안 나를 옥죄던 올가미가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난 그라피티 동아리 ‘ZERO’의 일원이 됐다. 함께하면서 그들에게 제법 합법적인 작업 의뢰도 들어오고 때와 장소에 맞는 메시지를 그림에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게릴라 식으로 사회 비판적 그림을 그리는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존재에 대해서도 접하게 되었다. 리더 유진은 미대 출신으로 그라피티와 접목한 작품 활동을 주로 했다. 특히 난해하게 취급되기만 하는 이상의 시를 시각적으로 추상화하는 작업에 관심 있었다. 우리는 주로 유진의 작업실에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전시회 갈까?”


 아침부터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오후 들어 폭우로 변했다. 

 

“하필 이런 날에요?”

 

이젠 제법 친해진 ZERO팀 멤버 한 명이 씩 웃으며 나섰다. 

 

“이런 날 평일에 가야 사람이 없거든.”

  

꼭 가려고 점찍어 둔 전시라는 뜻이다. 


장 미셸 바스키아. 유진이 열광하는 화가다. 원시적인 형태와 단순하면서 원색적인 색채가 공간을 압도했다. 불규칙하고 무질서한 선들이 금방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나와 세상을 휘저어 놓을 것만 같았다. 

 

“네 그림 처음 봤을 때 바스키아가 떠올랐어.”

 

어느새 유진이 옆에 와 있었다. 난 앞에 있는 그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 숫자와 문자 때문에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불안 속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진 느낌이랄까? 네 낙서에서 이상의 시를 발견했을 때 놀랐던 것도 바로 그런 집 밖의 정서를 잘 포착했기 때문이야.”

“가출 소년 이미지라는 말을 뭐 그렇게 돌려서 해요?” 

 

내 말에 유진이 쿡쿡 웃으며 받아쳤다.


“비약이 심했나? 하지만 이상 시인이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것은 분명해. 거기에 꽂힌 너도 독특하고 말이야. 이상과 바스키아는 둘 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이미지를 포착했다는 공통점이 있지."


그러면서 나를 힐끗 봤다. 


"난 네 그림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 재미있는 일화 하나 말해 줄까? 한 기자가 바스키아에게 그림 속 글을 해석해 달라고 했어. 그러자 바스키아는 모르겠다면서 그건 마치 음악가한테 음표는 어디서 따오는지 물어보는 것처럼 어이없는 질문이라며 일축했지.”

 

발걸음을 옮기다가 화실에서 본 것과 똑같은 그림을 발견했다. 유진이 웃으며 화실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라고 했다. 진품 값은 어마어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 화가 지금쯤 그림 때려치우고 놀고먹고 있는 거 아니에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유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눈빛에 묘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갑작스러운 부와 명성을 주체 못 했어. 결국, 약물중독으로 죽었지.” 

  

 뜻밖의 말에 의아해졌다.


 “모든 것을 다 가져서 파멸했다고요?”

 

 유진이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바스키아에게 삶의 원동력은 결핍이었으니까. 절박함 때문에 그림을 그렸을 텐데……. 성공한 삶이 과연 최선일까? 기자들 질문에 그토록 당당했던 바스키아는 그 후 죽을 때까지 데생을 못 하는 화가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어. ” 


“아이러니네요. 유명해져서 자신감을 상실하다니. 반면에 뱅크시는 자신에게 열광하는 미술계를 냉소적으로 조롱하잖아요. 두 화가는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반응이 전혀 달랐네요. 뱅크시가 미술의 상업성을 경멸하는 것은 그런 맥락일까요?”


내 말에 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난 뱅크시가 예술가라고 생각지 않아. 아마 스스로도 그렇게 여길걸. 그는 아트를 한다기보다 사회 비판 도구로 그림을 활용할 뿐이지. 일종의 포스터 같은 거야.”

  

“자신도 그라피티를 하면서 그런 말을 해요?”


“물론 로트렉이나 무하처럼 상업적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화가도 있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치열한 예술혼을 담았기 때문이야. 그런 면에서 본다면 뱅크시는 메시지를 담고자 하는 목적이 더 우선이라는 거지. 내가 거리의 그라피티와는 별개로 따로 캔버스에 작업하는 이유는 바로 그 예술혼을 담기 위해서야.”


“아트가 뭐 별건가요? 사람들이 보고 뭔가 느끼고 감동하면 되는 거잖아요. 예술의 상업성을 철저히 비판하고 일반 대중 속으로 파고든 뱅크시의 방식이 전 왠지 통쾌한데요.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에 만연한 위선을 조롱하고 풍자하잖아요.”


유진은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뭐 정답은 없는 거니까 ……. 흥미롭기는 하네. 상업미술의 정점에서 스러진 바스키아나 그 대척점에 있는 뱅크시. 둘 다 그라피티 아티스트라는 공통점도 그렇고. 그 둘이 마치 이상 시에서 언급된 거울의 양면성 같다는 점도.”

  

유진의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바스키아의 도록을 뒤적여 보곤 깜짝 놀랐다. 

 

 “흑인이네요?”

 

 내가 알던 화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낙서 같은 그림에다 흑인이라니…….

 

 “검은 피카소라고도 해. 제대로 된 정규 교육도 받지 않았고 너처럼 거리의 화가로 떠돌다가 발탁됐어.”

 “저처럼… 이요?”


 기분이 묘했다.

 

 “혹시 알아? 언젠가 네 그림도 이런 화랑에 걸리게 될지.”

  

 그 말을 듣는 데 심장이 두근댔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 당황스러운 나머지 얼른 농담조로 받아쳤다.

  

 “요절하라고요?”

 

유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저 낙서 같기만 했던 그의 그림이 다시 보였다. 사진 속 얼굴은 눈빛이 강렬했지만 공허했고 몹시 불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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