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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조은 Oct 28. 2022

ZERO-4

아르코 문학 창작기금 선정작

독서실에서 써야 할 시간을 ZERO팀에 쏟아 넣은 부작용은 피할 수 없었다. 유진이 내 그림에 어떤 기대를 하든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난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상에서 한 발 걸치듯 있다가 언제든 본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정서는 유진의 표현대로라면 아티스트라기보다 뱅크시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니까. 적당히 균형을 이루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편두통에서 해방되던 시점이었다. 의심에서 걱정으로 바뀌어 가는 엄마 눈빛을 애써 외면했다. 

 

“독서실은 열심히 다니는데 성적이 왜 이 모양이니?”

“몰라, 요즘 몸이 좋지 않은지 집중이 안 돼.”

"독서실보다는 과외하는 게 낫겠다. 힘들게 왔다 갔다 하느니.”

  

엄마가 초조한 투로 중얼거렸다.


“유난 좀 떨지 말아요. 성적이 내려갈 때도 있는 거지.”

  

그만 큰소리로 짜증을 내고 말았다. 곧 머쓱해져서 얼른 변명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고3 되려면 멀었잖아. 좀 더 혼자 해 보고.” 

“고3 금방이야. 웬만한 대학 가려면 고2 때 다 끝내야 해. 요새 고3 수시 원서 쓴다, 뭐 한다 해서 공부할 시간 있는 줄 아니?”

 

엄마의 말은 잊고 있던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럭저럭 유지하던 성적은 이미 통제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알고 있으면서 회피했던 것이 피부에 와닿자 두려워졌다. 지금껏 숨통을 조이는 것은 엄마라고 여겼는데 혼란스러웠다.

 

“너 요새 좀 뜸하다.”

 

 유진의 말투에 섭섭함이 배어있었다.

 

 “시험 기간이었어요.”

 

말하면서도 구차스러웠다. 엄마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난 자신이 없었다. 미술을 선택할 용기도 확신도 없었던 거다. 


 “미술을 전공해 볼 생각은 없는 거니?”


 내가 잠자코 있자 유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험생이 취미로 활동하기엔 무리라는 거 너도 알지?”

 

왠지 날 밀어내는 것 같아 서운한 감정이 솟았다. 갑자기 유진의 잔소리가 엄마의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결국, 물 흐리지 말라는 거네요.”


꼭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삐딱하게 내뱉고 말았다. 그러고 나니 계속 앉아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두말없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유진이 쫓아와 팔을 잡았다. 자기 확신에 찬 당당한 눈빛을 보자 자괴감이 들었다. 말없이 손을 뿌리쳤다. 어쩌면 난 구실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어정쩡하게 걸치고 있던 발을 빼낼 적당한 핑계 말이다.


ZERO팀에서 나온 지 꽤 되었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고 편두통만 다시 도졌다. 돌아갈 길이 막막해질수록 공부하는 내내 스프레이를 뿌리거나 그림 그릴 때 손맛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수학 공식을 풀다가도 어느새 몸에 밴 터치와 배색 감각 탓에 불쑥불쑥 색채가 떠오르면서 색 배합 비율이 계산됐다. 결국, 집 근처를 배회하는 나의 밤 산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네.”


엄마는 그 미친놈을 잡겠다고 혈안이 되었다. 비눗물과 수세미로는 도저히 감당 안 되자 아예 페인트를 칠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정 지나길 기다렸다가 장비를 챙겨 몰래 집을 나섰다. 흰색만 아니었어도 경솔하게 반응하진 않았을 텐데 터져 버릴 것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검정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흰색을 유린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색은 없으니까. 막상 벽을 마주하자 선명하게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들킬 위험도 잊은 채 정신없이 손놀림에 빠져들었다. 

 

“결국, 이럴 거면서 팀은 왜 떠났니?” 

 

느닷없는 목소리에 소스라쳤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유진이었다.

 

“스토커예요?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긴, 네가 여기저기 휘갈겨 대는 통에 우리가 또 난처해졌으니까. 네 그림체, 생활 패턴은 내가 이미 꿰고 있던 거고.” 

 

유진이 손전등으로 방금 내가 그린 그림을 비췄다.


“이런 식으로 낙서만 하게? 정말 뱅크시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야?”

 

낙서, 흉내라는 말에 감정이 치받쳤다. 유진이 잡은 팔을 거칠게 확 뿌리쳤다.


“이게 뭐 어때서요?”

“의미 없이 방치되다가 무자비하게 지워지겠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것이 기어코 폭발하고 말았다.


“상관하지 말라고요.”


나는 손전등을 빼앗아 던져 버렸다. 어둠 속에 솟구친 빛이 포물선을 그리다가 단말마와도 같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꺼졌다. 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이 동시에 들렸다. 곧이어 연쇄 반응처럼 이 집 저 집 불이 켜지고 개까지 짖어 댔다. 바닥에 널브러진 스프레이 통을 미처 수습할 틈이 없었다. 대충 배낭만 챙겨 든 채 유진의 손을 잡고 미리 봐 두었던 골목으로 허겁지겁 내달렸다. 골목에 들어서서 숨을 헐떡이자 유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나와요, 지금?”

 

“우리 처음 봤을 때 생각나니? 그땐 너 어리바리해서 나 아니었으면 잡혔을 텐데 지금은 아예 밤손님으로 나서도 되겠어.”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를 쫓던 발소리가 포위망을 좁혀 왔기 때문이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유진이 재빨리 내 몸을 훑었다. 


 “겉옷만 벗으면 대충 혐의를 벗을 수 있지? 시간을 벌 테니까 옷부터 정리해.” 

 “왜 도망쳐요? 같이 시침 떼면 되잖아요.”

 

 그러자 유진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나, 이 바닥에선 나름 유명 인사거든. 이 동네에서 네가 한 짓 다 뒤집어쓰라고?” 


말은 그렇게 해도 유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윙크까지 하고 골목 밖으로 내달렸다. 삑! 호각 소리와 함께 뒤를 쫓는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재빨리 모자와 겉옷부터 벗어 배낭 속에 구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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