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바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천양희 , 「뒤편」중에서
엄마 등 뒤에 누워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여기야, 이쯤?”
“조금 더 왼쪽… 거, 거기.”
속이 아프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등 쪽이 아프다고 했다. 고통이 꽤 있는 듯했다. 뒤에서 본 엄마의 등은 살이라곤 없이 뼈만 도드라져 있었다. 요즘 살이 많이 빠졌다고 하더니, 이렇게까지 마른 줄은 몰랐다. 그래도 딸내미가 모처럼 곰살맞게 등을 쓸어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니, 엄마는 내심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음에는 높은대 가보자.”
높은대는 엄마의 고향이다. 그 말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국민학교가 산 너머에 있어 새벽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고 했다. 막내딸이 안쓰러워 외할아버지는 말리셨지만 언니들조차 다니지 못한 학교를 간다는 게 좋아 기어이 졸업을 했다고 한다.
높은대는 산골이라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했다. 지금은 흔하디 흔한 감나무는 적었고, 먹을 것도 없는 고욤나무가 많았는지 고욤을 삭혀 먹던 이야기를 하며 달고 맛있었다고 했다. 그 뒤로 외가는 높은대를 떠났고,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높은대 이야기에서 시작해 우리와 함께 다녔던 여행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엄마는 꼭꼭 눌러두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엄마의 등 뒤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등 뒤가 아니었다면 오늘 있었던 일 몇 가지를 나누다 말았을지도 모른다. 등 뒤였기에,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여행에서 돌아와 찍어온 사진들을 다시 봤다. 사진 속 엄마는 크게 웃고 있지는 않았지만 온화한 표정이었다. 문득, 엄마의 뒷모습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찍었지... ' 앞이 아닌 뒤편을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사진들도 찾아보았다. 갤러리 속 사진들은 모두 다른 순간인데도 어딘가 비슷했다. 대개는 환하고 멋진 앞모습들이다.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주로 얼굴을 담아왔다. 앞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로 채워진다. 그래서 대체로 밝고 정돈되어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적이 있다. ‘아, 이런 모습이 있었네.’ 생각지도 못했던 그 사람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 그이는 조금 느슨했고, 덜 준비되어 보였다. 그 모습이 오래 남았다. 그 이후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자주 살펴보게 되었다.
사람들의 뒷모습에는 드러나지 않은 뒤편이 묻어 있다. 누구에게나 쉽게 보이지 않는 면이. 가까운 이들만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는 내면이다. 뒤편을 숨기는 이유는 그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실수와 실패, 좌절과 인내, 애씀과 외로움 같은 시간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힘겹게 껴안고 지나온 것들은 대개 말없이 등을 보이며 남아 있다.
뒤편은 일부러 살피지 않으면 끝내 보이지 않는다. 달의 뒷면처럼 늘 존재하지만 쉽게 드러나지 않는 면이다. 눈에 띄는 모습 뒤에는 조용히 버텨온 시간들이 있고, 그 시간들이 오늘을 떠받치고 있다.
햇빛이 내려앉은 바다 위로 바람이 지나가며 잔물결을 만들었다. 윤슬이 일렁이는 바다를 천천히, 오래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예쁜 풍경을 배경으로 각자의 ‘인생컷’을 남기느라 바다를 곁눈으로 훑고 지나갔다. 남편은 그런 아이들을 찍고 있었고, 나는 그런 남편의 등 뒤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앞서 걷고 우리가 그 뒤를 따르는 풍경은 특별할 것 없는 여행의 한 장면이었다. 늘 그래왔듯 아이들은 앞을 향해 걷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가끔씩 우리를 찍기 시작했다. 앞서 걷다 말고 뒤돌아서서, 우리를 프레임 안에 넣었다. 늘 뒤에 있던 우리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아이들에게도 이제 우리의 뒤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걸까. 말로 설명하지 않았던 시간들과 뒤에서 살피던 마음들이.
아이들이 걸어온 길에는 부모의 시간이 담겨있다. 엄마의 등 뒤에서 보낸 그 밤 이후로 내 길 위에 새겨진 엄마의 시간이 생각났다. 그래서 앞모습만큼이나 뒷모습을 살피게 되고 또 자주 바라본다. 그 조용한 뒤편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