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한 모든 순간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상큼한 날이었다. 신입생이 된 딸의 초대로 캠퍼스를 방문했다. 학교생활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걱정과 기대가 넘나들었지만, 봄볕과 봄바람을 등에 업고 캠퍼스를 거닐다 보니 마음에도 봄빛이 가득 찼다. 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니 대학 박물관 규장각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무관평생도’를 만났다.
무관(문관) 평생도는 조선시대 관료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여덟 폭 병풍에 담아낸 그림이다. 개인의 일대기이지만 한 시대가 꿈꾸던 삶의 질서가 겹겹이 담겨 있다. 한 장면 한 장면을 따라가다 보니 한 사람의 평생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무관평생도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어느 무관의 한평생이 여덟 장면 병풍 속에서 말을 걸어왔다. 순간, 내 삶의 조각조각이 병풍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를 키워온 시간으로 이루어진 ‘부모 평생도’를.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지금 이 순간이 작고 보잘것없는 생의 빛나는 한 순간으로 평생도 8폭 병풍의 한 장면이 되었다. 그날 이후 ‘부모평생도’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첫 장면은 분명하고 확실했다. 부모가 된 순간이다.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다가온 아이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하던 순간, 태교 때 들려주던 말을 알아듣는 듯 눈을 번쩍 뜨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다소 늦은 나이에 엄마가 되어 세상사에 덜 휘둘릴 거라 믿었지만,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고, 좋은 엄마'이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시간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진통이 뒤따랐다.
초등학교 입학식 다음 날 아이는
“오늘부터 혼자 갈 거야"
라며 독립을 선언했다.
어느 날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뽑기를 하느라 용돈을 모두 쓰고 오기도 했고, 한동안은 비스트(하이라이트)의 팬이 되어 모든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기도 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이는 말했다.
“조금 부족한 듯이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왜?”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야 뭔가를 하려고 할 것 같아.”
대학 졸업 후에는 이런 문자를 보냈다.
“대학을 다니는 긴 시간 동안 끝까지 믿어주고, 나의 길과 나의 시간을 응원해 줘서 고마워.”
아이는 그렇게 작은 실수와 스스로의 선택을 감당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부모평생도의 몇 장면은 이미 아이와 함께 완성되었고, 이제 남은 장면들은 아이 스스로 그려가도록 남겨졌다.
앞서서 길을 열어주던 시간에서, 나란히 걷는 시간을 지나, 어느 순간 한 발 물러서 지켜보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부모의 모습이다.
무관평생도가 한 사람의 삶을 여덟 장면으로 정리해 보여주었듯, 부모평생도는 아이의 성장과 함께 이어져 온 부모의 시간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그 속에는 한 사람의 인생을 떠받쳐 온 평생이 담겨 있다. 그리고 부모평생도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