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것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스미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다가 이 대사를 듣는 순간,
고구마 맛이 떠올랐다.
꾸덕꾸덕 말라가는 곶감
누렇게 빛바래져 가는 호박고지,
마루 끝에 내려앉은 늦가을 햇볕 한 줌,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구마 한 소쿠리.
식구들의 왁자한 소리...
배와 마음이 따뜻해지던 순간이었다.
그날의 맛, 색깔, 온도, 냄새,
공기의 밀도, 웃음의 무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에 스며들었다.
고구마를 좋아하지만 지금은 잘 먹지는 않는다. 기억 속 그 맛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고구마는 수분이 많은 물고구마다. 길쭉한 모양에 말랑하고 뭉근한 단맛이 혀 안쪽에서 천천히 퍼지던 고구마.
시골을 떠나 도시에 정착하면서 어릴 적 먹었던 고구마를 찾기 위해 시장과 마트를 기웃거렸지만 대부분은 작고 단단한 밤고구마였다. 간혹 보이는 물고구마도 어릴 적 그 맛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입맛이 변하면서 물고구마는 점점 보기 어려워졌다. 그러다 물고구마의 사촌쯤 되는 호박고구마를 만났다. 아쉬운 대로 추억 속 물고구마 맛에 대한 허기를 어느 정도 달래주었다.
지난가을, 남편이 고구마 한 박스를 들고 왔다. 지인이 농사지은 것이라고 했다. 한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채 두었다. 어릴 때 보았던 물고구마와 생김새가 달랐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기억 속의 그 고구마 맛이 떠올라 고구마를 삶았다. 얇은 겉껍질을 벗기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사이로 말랑말랑하고 노릇한 속살이 드러났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혀가 먼저 알아보았다. 어릴 적 그날의 맛이었다. 순간, 마음이 해사해졌다. 고구마를 까서 옆에 있던 아이에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안 먹겠다던 아이도 못 이기는 척 한 입, 또 한 입 먹었다. 그런 아이가 예뻐서 자꾸 말을 걸었다.
"이 고구마는 말이야..."
"어릴 때 먹었던 고구마는..."
실없는 이야기들이 고구마의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사라질 뻔했던 재래종 물고구마가 다시 복원되어 ‘맛의 방주’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잊지 않기 위해 누군가는 기억을 지켜내고 있었다.
말도, 맛도,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깊이 스며들어 있다가 어느 순간 아주 사소한 계기로 영혼 깊은 곳에서 살아나 다시 우리를 따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