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름을 부르면 마음속에 등불 켜진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나지막하고 따뜻해서
그만 거기 주저앉고 싶어진다.
애린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부르면 가슴이 저며온다.
흰 종이 위에 노랑나비를 앉히고
맨발로 그를 찾아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는 없다.
연모란 그런 것이다.
-이기철, '어떤 이름'
벚꽃으로 찬란한 봄날, 아버지는 혼자 공원을 다녀왔다. 늘 엄마와 함께 가던 곳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꽃이 얼마나 피었는지, 어느 길이 더 아름다운지 보고 와서 엄마에게 전했다.
엄마가 아프면서 아버지 삶은 크게 흔들렸다. 여든이 넘도록 엄마가 차려주시는 밥상을 받아왔던 아버지는 가끔 청소기를 돌리는 일 외에는 집안일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시기에, 아버지는 평생 해 본 적 없는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해야 했다. 해본 적이 없었기에 서툴고, 애는 쓰지만 티가 나지 않는 시간들을 어설프게 건너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으로 엄마를 돌보고 있었다.
벚꽃 소식을 들은 엄마는 꽃구경을 가고 싶다고 했다. 비록 차 안에서 바라본 벚꽃이었지만 엄마의 얼굴은 오랜만에 환해 보였다.
한참 전, 엄마의 시간이 의미 있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무언가 배우기를 좋아하는 엄마한테 꽃그림 색칠하기 책을 사 드렸다.
처음에는 무덤덤하게 받아 두는 듯했지만, 이내 색칠하기를 시작했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엄마가 색칠한 꽃은 색감이 자연스럽고 명암이 살아 있었다. 그런 모습이 좋아 그 후로도 여러 권을 더 사드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는 책에 나온 꽃의 이름을 하나 둘 익혀 갔다. 가끔 내가 꽃 이름을 물으면, 엄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점차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이 많아졌다.
엄마가 나보다 더 많은 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내가 묻고, 엄마가 답하는 그 시간들이 이어졌다.
엄마는 본인의 병을 알고 나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듯, 주변의 것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오래 간직했던 물건도, 소소한 살림도,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림책과 색연필과 물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비로소, 좋아하는 것 하나를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거쳐 알게 된 일을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가 공원을 다녀왔다. 공원에는 지금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엄마한테 하나씩 들려줬다.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찾아 들려줬다.
돌아오는 길, 아버지 손에는 붕어빵, 재첩, 굴 등이 들려 있었다. 엄마가 좋아하거나, 엄마에게 좋은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