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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Dec 30. 2018

천국의 계단 위의 스잔나

진추하와 레드 제플린

가게에서 주최하는 음악 이벤트에 항상 참가해 주는 아퀴라고 부르는 뮤지션이 있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이민자인 그는 이곳 석유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지금은 은퇴하고 매일매일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러 여러 스테이지를 전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분의 기타 실력은 보통이 아니어서 어떤 노래이든 그분의 기타 인트로가 시작되면 관객들의 환호가 이어진다.   Fish & Chips 메뉴를 즐겨 찾는 그분은 "여기 오면 음식이 맛있어서 음악에 집중이 안되네..." 하는 기분 좋은 농담을 던지곤 한다.   한 번은 그분과 음악 얘기를 오랫동안 했던 날이 있었다.   음악을 시작하는데 영향을 준 것들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을 들추면서 그분은 프랭크 시나트라나 냇 킹 콜 같은 분들을 거론했는데, "너에게 영향을 준 뮤지션은 누구야?"라는 질문을 받고 어릴 적 내가 음악에 깊게 빠지게 된 기억이 떠올랐다.


큰 외삼촌은 연극인이셨다.   그렇다고 내가 외삼촌의 연기를 본 적은 없다.   처음부터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다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외삼촌은 항상 취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가 모아둔 귀한 양주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모금에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아버지에겐 그 술들은 그저 응접실 한쪽을 장식하는 진열품이었고 외삼촌이 올 때마다 장식의 모양이 바뀌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도 외삼촌은 기분 좋게 취해 아버지를 붙잡고 예술과 문학 얘기를 토해내고 계셨다.   나와 내 동생들은 부엌에 들락거리며 어머니가 만든 안주 쪼가리를 주어 먹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던 삼촌은 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난 응접실에 끌려 들어갔다.   내가 잘 아는 친구가 음반업계에 있거든… 이번에 새로 나온 레코드야…  아무한테 말하지 말고 혼자 감상해라… 그 당시 우리 집에 전축은 있었지만 그것 역시 거의 진열품 수준이었고 레코드라고는 한 번도 바깥 구경을 못하고 케이스 안에 처박혀 있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 전부였다.  삼촌에게서 건네받은 레코드 재킷에는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보였고 거기에 커다란 비행선 같은 모양이 합성되어 있었다.   어찌 되었든 레코드 선물을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나는 정말 신이 났다.   비닐을 뜯지 않은 앨범에서 나는 냄새가 향긋했다.   거기에는 Led Zeppelin II라고 쓰여 있었다.   삼촌에게 이 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았던 것 같은데 삼촌도 잘 모른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내방 한 귀퉁이에 그 레코드를 곱게 모셔 놓고 응접실의 전축에 몰래 레코드를 걸어 볼 기회를 찾게 되었다.   레드 제플린… 과연 어떤 음악일까… 그 당시 유행하던 송창식 김세환 양희은 같은 사람들의 노래 같을 것일까… 서양 노래라고 해봤자 폴 앙카나 죤 덴버 정도가 나의 팝송 지식의 전부였던 나에게 이 한 장의 레코드는 호기심 덩어리였다.


그러다 찾아온 기회… 부모님들이 집을 비우고 동생들도 집 밖으로 놀러 나간 틈을 타 드디어 조심스럽게 레코드를 꺼내 사이드 A 면을 턴테이블에 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Whole lotta love의 전주… 생전 들어보지 못한 굉음에 깜짝 놀란 나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나는 마치 들어서도 봐서도 안 되는 나쁜 일에 휘말린 사람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볼륨을 최대한 줄인 상태에서 다음 곡 그리고 그다음 곡으로 재빨리 바늘을 옮기며 혹시나 내 취향(?)에 맞는 곡이 있는지 들어 보았다.   내 귀를 혼란스럽게 하는 기타 소리와 세상을 다 빠개버릴 것 같은 드럼 소리, 거기에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찢어질듯한 보컬은 그냥 내 정신을 빼놓고 말았다.   노래 같지도 않은 귀신이 곡하는 것 같은 소리가 담겨 있는 이상한 음반을 내게 넘긴 외삼촌을 원망하며 그날 이후로 레드 제플린은 베토벤 교향곡 옆자리에 끼여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는 나는 야구에 미쳐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야구단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바로 글로브와 배트를 챙겨 친구들을 만났다.   철봉을 하다가 떨어져 오른팔에 깁스를 한 상태에서도 외팔로 피칭 연습을 할 정도로 야구광이었던 나는 중학생이 되자마자 다른 것에 꽂히기 시작했다.   바로 음악이었다.   내가 음악에 미치기 시작한 계기는 친구들과 영화관에 몰래 들어가서 본 홍콩 영화 ‘사랑의 스잔나’였다.    나는 그 영화의 스토리나 작품성과는 아무 상관없이 진추하라는 천사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앉은자리에서 같은 영화를 3번 연속으로 보았다.   세상에 이쁜 여배우들은 넘쳐났고 한국에도 정윤희 유지인과 같은 여신들이 있었지만 진추하는 달랐다.   그녀는 분명 내 전생 어디쯤에선 가에 엮여 있었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나 졸업식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날 이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난 바로 진추하가 피아노를 치는 그 청아한 모습의 포스터를 구해 책상 앞에 걸었다.   그녀를 향한 내 구애의 마음은 포스터가 뚫어질 정도로 심각했다.   결국 그녀의 노래를 그녀의 피아노를 흉내 내어보는 작업으로 내 흥분을 가라앉히기로 하고 연습에 들어갔다.   그 당시 다행히 바이엘과 체르니를 억지로 라도 마친 상태였던 나는 흰건반과 검은건반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졸업의 눈물’ 악보를 보며 밤낮으로 연습에 돌입했다.   진추하는 내 열정의 여신이었고 난 마치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듯 피아노에 몰입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제법 그럴듯한 연주가 내 손에서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클래식 기타가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주부 클래식 기타 학원에 등록하고 일주일 만에 그만두시는 바람에 기타는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학원을 등록하며 구입한 기타 교본에는 기본적인 코드의 운지법이 나와 있었고 나는 피아노를 치다 지치면 기타를 치고 기타를 잡다가 손가락이 아프면 다시 피아노를 치는 세월을 보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나름 연습을 거듭하는 가운데 화성법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모든 노래에는 어떤 패턴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꼈던 것 같다.    음악에 대한 정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 들의 멘트가 전부였지만 내 마음속에 유토피아를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결국 진추하에서 시작된 내 음악 열정은 서서히 영국이나 미국 아티스트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라디오에선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멜로디에 ‘건전한’ 가사가 담긴 팝송들만이 선곡되어 흘러나왔지만 나는 빌보드 차트에 누가 뜨고 누가 지는지 훤히 꾈 수 있을 정도의 음악 마니아 가 되어가고 있었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못하지만 Stairway to heaven 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것도 그 당시였다.   3대 기타리스트를 얘기하고 헤비메탈과 하드록의 차이를 얘기하던 때였고 뮤지션들마다 6분 7분짜리 긴 곡들을 작품으로 내놓을 때였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는 멋진 타이틀과 함께 앞부분의 서정적인 멜로디는 나를 비롯한 음악 듣는 사람들의 귀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때 갑자기 베토벤 옆에서 먼지가 쌓여가던 레코드가 생각이 났다.   이 사람들이 그 사람들?   난 깜짝 놀라 몇 년 동안 썩혀 두었던 앨범을 다시 턴테이블에 걸었다.   그 순간 내 가슴속에 숨어있던 마그마 같은 것이 폭발하며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았다.   이거다… 이것이 진정한 음악이다… Hearbreaker, Moby Dick, Whole lotta love로 이어지는 무겁고도 엄숙한 사운드는 내가 추구하는 음악의 신전 앞에 모셔지게 되었다.   난 그날로 내 오랜 여신인 진추하 옆자리에 지미 페이지 사진을 모셨다.    진추하가 내가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면 레드 제플린은 내가 도착한 꿈의 나라였다.   진추하가 사춘기 내 가슴에 불을 놓았다면 레드 제플린은 내 마음에 나름 이성적으로 건설된 용광로를 심어 주었다.


몇십 년이 지나 중년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레드 제플린은 나의 음악적 신으로서 존재한다.   아직도 그들과 대항해서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고수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아니… 있다 하더라도 내가 구축해 놓은 신전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진추하 역시 마찬가지다.   첫사랑이 그렇듯 그녀는 내가 만들어낸 나만의 추억이고 나만의 기억이다.   몇 년 전에 진추하가 콘서트 7080에 나온 모습을 보았다.   당연히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진추하는 아니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내 가슴속의 나의 여신은 언제나 방긋 웃으며 오늘도 내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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